청자 기술이 고려에 온 까닭

일본이 고려의 번영을 약속했다

by 역맥파인더

12. 한중일 삼각 국제분업체제


송 철종(哲宗)의 전략은 간단했다. 일본은 고려의 지도 아래 시즈오카를 중심으로 전 세계에 유통될 차(茶)를 재배하고 고려는 그렇게 키워진 시즈오카의 차(茶)들을 고려로 들여와 가공해 명주(영파寧波)로 수출하면 송나라는 자신들의 선박(神舟)으로 해상 무역로를 통해 전 세계로 차(茶)를 유통시킨다는 전략이었다. 이렇게 되면 표면적으로 송나라가 일본의 차(茶)에 대해 그 어떤 관계도 맺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여져 실크 로드 무역 상방(貿易 商坊)들이 거란과 탕구트족같은 북방의 유목민족을 지원해 송나라를 침략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철종(哲宗)은 판단했다. 송나라를 그토록 오랫동안 괴롭혀 온 거란족의 요나라도 지금의 탕구트 서하처럼 갑자기 나타난 신흥 군사 강국이었다. 당나라가 발해라고 부르던 고려를 광개토대왕 이후 오백 년 넘는 세월 동안 상전(上典)으로 모셔온 거란족이 발해를 그렇게 쉽게 멸망시키고 제국을 차지한 건 실크로드 무역상 그중에서도 소그드 무역 상방(貿易 商坊)의 전폭적인 지원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철종(哲宗)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나타난 거란족은 연운(燕雲) 16주까지 차지하며 대제국으로 성장해 지금까지도 송나라를 위협하고 있는 중이었다.


고려의 고령토와 규조토 <출처: YTN>


송나라가 일본의 차(茶)를 이용해 해양 무역로를 활성화하고 장악하려는 계획에 고려를 중계국(中繼國)으로 포함시킨 데에는 또 하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차(茶)를 원양(遠洋) 해상 무역망으로 유통시키기 위해선 모든 수분(水分)과 습기(濕氣)를 차단하면서 쉽게 깨지지 않는 특별한 운반용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는데 일본에는 그런 용기인 청자를 구워낼 흙조차 없었다. 백방으로 찾아 헤맸으나 결국 실패했다. 그러나 고려는 도기(陶器)의 나라 가야가 있던 땅답게 고령토와 규조토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고려와 일본을 오가는 항로와 고려와 송나라의 주산군도를 잇는 항로 동안만이라도 버틸 수 있는 선박과 청자를 고려가 보유할 수 있도록 결정되었다. 백자는 결단코 누출되어선 안 될 극비였다. 원양항해가 가능한 범선 제작기술 또한 극비였다. 삼국 분업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비밀리에 대규모의 청자 생산기지가 고려 요지(要地)들에 건설되었다. 청자 제작 관련 기술자와 도자기 굽는 가마(窯) 관련 기술자들이 송나라에서 파견되어 요지(窯址) 건설들을 주도했다. 청기와 장수들이었다.


고려 연안 항해를 위한 특수선인 판옥선과 원양 항해를 위한 첨저선 비교 <출처: 경기도 교육청>


일본과 고려, 고려와 송나라 주산군도(舟山群島)를 오고 갈 선박(船舶)들이 고려에서 만들어졌다. 암초가 많은 고려 연안(沿岸)을 고려해 튼튼한 소나무로 배 밑바닥을 평평하게 설계한 선박들이었다. 나무못만을 쓰는 고려 전래의 배 만드는 기술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변산반도(邊山半島)와 완도(莞島)에 추가적인 대규모의 소나무 조림사업이 이루어졌다. 송나라에서 투자되는 막대한 자금은 고려를 풍요롭게 해 주었다. 일본 시즈오카에서 키운 차들을 고려로 가져오고 다시 고려에서 중국까지만 운송하는 역할을 담당한 고려에서 중국 청자가 압도적으로 출토되고 백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고고학적 유물 증거는 고려의 청자가 한중일 삼각 국제 분업체제에서 어떤 위치와 역할을 담당했는지를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런 중국 청자가 절(사찰과 사원)들에서 유독 많이 발견되는 것은 한국의 불교가 어떤 성격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단초가 된다. 장발(長髮)이었던 부처의 제자들이 굳이 삭발을 했던 연유와도 관련이 있고 사찰과 사원, 암자라 쓰는 곳을 절이라고 부르게 된 사연도 여기에 터 잡는 것이었다.


※ 표지 사진 출처: 인천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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