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파가 고려를 증오한 이유

철종의 승부수는 의천이었다

by 역맥파인더

11. 대각국사 의천과 천태종의 진실


왕안석을 내세워 밀어붙인 신종의 국제분업 정책은 결국 중단되었다. 경력신정(慶歷新政)이라 불린 인종(仁宗)의 개혁처럼 희령신정(熙寧新政)이라 불린 신종(神宗)의 개혁도 7년을 넘기지 못하고 좌절됐다. 1085년 신종이 죽자 왕안석도 다음 해 죽었다. 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철종(哲宗)은 그의 아버지가 못다 이룬 유업을 다시 일으키기엔 아직 어렸다. 황제의 섭정이 된 신종의 어머니 태황후는 대일본 투자정책이 옳지 않다고 줄곧 주장해온 사마광을 등용했다. 재상이 된 사마광은 비판해 온 청묘법뿐만 아니라 모역법(募役法)이라고도 불린 면역법(免役法)도 폐지했다. 조역전을 내지 않게 되자 관리들과 대상인, 사원의 승려들은 환호했고 면역전을 내지 않아도 되자 일반 백성들은 절망했다. 시즈오카에 묘목 된 차 재배단지는 송나라 조정에 의해 방치됐으나 교토로부터 천시받아온 관동지역 일본인들에 의해 정성껏 관리되었다. 할머니가 섭정으로 나서는 바람에 실권이 없던 황제였으나 철종은 즉위하자마자 고려에서 밀항해 온 고려 왕자 승려 의천을 접견하고 극진히 대접하도록 조치하면서 아버지 유업인 희녕변법을 비밀리에 다시 추진하기 위한 자신만의 계책을 다듬기 시작했다.


대각국사 의천의 송나라 밀항 경로 <출처: KBS1>


1093년 할머니 태황후가 죽고 친정을 시작하면서 철종(哲宗)이 아버지 신종의 실패를 거울삼아 내놓은 대안은 고려를 내세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의 신법이 송나라 조정이 직접 나서서 일본의 차 재배와 차 무역을 주도한 것이라면 철종이 구상한 소성변법(紹聖變法)은 송나라 대신 고려가 일본의 차 재배와 차 무역을 주도하는 것이었다. 대신 실크로드 무역 상방들에게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그들이 알게 되기 전에 일본과 고려에 탄탄한 무역망을 조직하려는 철종의 복안이었다. 당연히 표면상 고려가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고려를 지원하는 제반 사업에 송나라 황실의 내탕금이 사용되었고 곧이어 국가재정이 비밀리에 투입되었다. 시즈오카의 차 재배단지에는 송나라 관리 대신 의천이 추천한 천태종단 소속의 고려 승려들이 파견되었다. 장보고가 운영했던 청해진과 적산법화원 조직이 연구되어 송나라와 고려 그리고 일본의 삼각 분업체제에 반영되었고 장보고가 당시 구축했던 일본 천태종단 소속 사찰들을 연결한 차(茶) 유통 조직이 복구되어졌다. 일본의 천태종단은 장보고와 청해진을 기억하고 있었다. 고려에 대한 지원이 비밀리에 확대되면 될수록 소동파의 독설은 상소에서 점점 더 극렬해졌고 고려에 대한 비판은 증오에 가까워 갔다.


고려 중기 한중일 3국 무역 경로 <출처: KBS1>



전 세계 차 무역을 독점하고 있는 진상(晉商)과 소그드상 연합체에 대적하기 위해 송 황제 철종이 동원한 조직은 불교 천태종단이었다. 실크 로드 무역상들의 지원을 받은 당나라에 의해 멸망한 수나라 때부터 일본의 차(茶)를 무역로에 올려 해양 무역을 확충시켜야 한다고 역설해 온 종단이 천태종이었다. 진상(晉商)과 소그드상 연합체의 지원을 받았던 당 태종과 밀착했던 자은종단(慈恩宗團) 이라고도 불렸던 법상종단(法相宗團)에 의해 거의 도륙(屠戮)되었던 천태종단이 해양무역을 돌파구로 삼은 송나라 때에 법상종단을 제치고 주도 종단이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린 로드(Marine Road)를 개척해 원양 해상무역을 확대해 나가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판단한 송나라 신종 때부터 송 황실은 천태종단(天台宗團)을 지원했다. 고려왕 문종의 다섯째 왕자로 승려였던 의천이 고려 사신으로 선정되어 송나라로 극비 초청된 것은 그가 진상과 소그드상 연합체의 지원을 받는 법상종단과 아무런 연고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었다. 전북 김제 금산사가 본산인 고려 법상종단은 후일 이자겸의 난으로 몰락한 경원 이씨(인주 이씨) 일족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는데 이들은 일본의 차(茶)를 해상 무역로를 통해 교역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금산사(金山寺) 주지로 법상종단을 이끌고 있던 이자연(경원 이씨, 인주 이씨의 중시조)의 다섯째 아들 혜덕왕사 소현은 문종의 여섯째 아들인 왕자 승려 왕규를 후계자로 육성하고 있었다. 도생승통(道生僧統), 보응승통(普應僧統)이라 불리며 김제 금산사 주지로 고려 법상종단을 이끌던 왕자 왕규는 그러나 후일 결국 넷째형 숙종(肅宗)의 아들 예종(睿宗)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IMG_6329.JPG 대각국사 의천의 적수였던 고려 법상종단의 본산-김제 금산사 <출처: Wikimedia Commons>


※ 표지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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