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와 안록산 반란의 진짜 목적

백자 요지를 파괴하라

by 역맥파인더

9. 백자와 안록산 반란의 진짜 원인


송나라가 서하와 7년간의 전쟁 끝에 1044년 굴욕적인 화평 조약(경력화의 慶曆和議)을 맺어 하서회랑의 지배권을 포기한 건 사실 사천(四川)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사천을 지킨다는 건 사천의 땅을 지킨다는 게 아니라 몽정산(蒙頂山)과 천태산(天台山)을 중심으로 천년 이상이나 육성해 온 차(茶) 재배 산업을 지킨다는 걸 뜻했다. 차(茶)만 있다면 그 차(茶)를 교역해 마련한 돈으로 언제든 국방력을 키워 지금껏 받아온 손해와 굴욕을 일거에 벌충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차(茶) 산업을 위해 송나라 4대 황제 인종이 하서회랑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기반은 당시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도자기 산업이었다.


차의 최초 인공 재배지인 천태산과 몽정산의 위치 <출처: 구글 지도>


섭씨 1300도 내외의 열을 견디며 두터운 유약이 그릇 안팎의 표면을 유리질로 덮어주는 청자도 훌륭한 것이었지만 1400도까지 오르는 열을 견디며 특별한 유약의 두터운 시유(施釉) 없이도 안팎으로 완벽한 방수가 되면서 쇳소리까지 낼 정도로 높은 경도를 자랑하는 백자는 송(宋) 황제 인종의 든든한 믿는 구석이었다. 백자는 장석질(알루미나) 함유량이 높아 유백색을 띄는 고령토란 흙으로 만든 자기였는데 고령토란 이름이 붙은 이유는 북경 북쪽에 위치한 고북진(古北鎭) 남단에 있는 조하(朝河 Chaha river) 변의 고령진(高嶺鎭)에서 캐낸 흙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고령토로 빚은 하얀색 자기, 백자가 해양무역을 발전시킬 절대반지가 될 거라는 위험성을 일찌감치 파악한 소그드 방 (sogd坊)과 진상방(晉商坊) 연합체(syndicate)는 그들에게 매수되어있는 내시(內侍)들과 환관들을 움직여 744년 안록산을 평로 절도사에 이어 범양 절도사까지 겸임하도록 조치한 뒤 그의 관할 구역 내에 있는 자현(磁縣)과 형태시(刑台市), 보정시(保定市)등에 있는 고령토(高嶺土) 백자(白瓷) 가마들을 폐쇄토록 했었다. 이로써 백자 생산을 원천적으로 중단시킬 수 있었던 것도 잠시,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당나라 황제 현종이 백자 생산 재개를 강력하게 명령하는 바람에 안록산은 반란까지 일으켜야 했다. 당나라 황제 현종의 생산 재개 명령으로 백자를 다시 생산하고 있던 백자 요지(窯址)였던 보정시 곡양현(曲陽縣), 형태시 내구현(內丘縣), 한단시(邯鄲市) 자현(磁縣)등은 안록산 반군의 진군로가 되어 모두 파괴되어졌다. 안록산의 낙양 진군로로 위장되어 있으나 안록산 반군의 진짜 목적은 백자 생산을 못하도록 백자(白瓷) 요지(窯址)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백자 생산지 <출처: 구글 지도>


당나라 현종은 즉위한 지 2년 만인 714년에 지금의 광동에 시박사(市舶司)라는 관청을 다시 설치해 선박을 통한 해외무역을 공인하고 741년엔 광주(지금의 광동)에 외국인 상인들이 거주할 수 있는 번방(蕃坊)을 설치해 선박을 통한 원양 무역을 적극 권장한 용감한 황제였다. 따라서 백자는 원양 해상무역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기에 당 현종은 백자 생산을 적극 독려했었다. 할아버지인 당 고종 황제가 무엇 때문에 식물 황제가 되었는지를 몰랐던 소치(所致)에서 나온 현명함이었음이 안사의 난으로 증명되었고 백자는 결국 당나라 의종(懿宗) 때에 법문사(法門寺) 지하궁전에 입고되어 비밀에 부쳐졌다. 이런 어두운 역사는 백자가 해상무역 발전을 결정하는 기술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북송 황제 인종은 범중엄을 기용해 경력신정(慶曆新政)이란 개혁을 서둘렀다. 굴욕적 조약으로 지켜낸 사천 땅에서 키워 수확된 뒤 청자들에 담겨 완벽히 밀봉된 채 장강을 따라 배로 운반된 차들은 동남해안의 복주, 천주, 광주 등 여러 항구도시에서 백자로 옮겨져 전 세계로 팔려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자 생산이 확대되자 사천에서부터 차는 백자에 담겨 장강을 출발했다.


안록산 군대의 진격로와 백자 생산지 <출처: Wikimedia Commons>


그러나 개봉 북쪽으로 흘러 산동반도 북쪽의 래주만(萊州灣)으로 빠져나가던 황하가 1048년, 갑자기 물줄기를 북쪽 거란 땅으로 틀어버린 대사변이 일어났다. 태행산맥을 따라 북쪽으로 흘러 발해만으로 가던 옛날 물줄기를 따라간 유역(流域) 변경이었다. 안록산이 파괴했지만 다시 복구되어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곡양현(曲陽縣)에 자리 잡고 백자를 맘껏 생산해내던 정요(定窯)가 물줄기를 바꾼 황하에 묻혀버렸다. 인종 황제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백자 생산 관련 기술자들과 가족들에 대한 긴급 구제를 명하는 조서와 칙서에 각각 도장을 찍은 후 인종은 혼절했다. 범중엄과 함께 한 경력 신정의 짧은 꿈은 1048년부터 시작된 황하의 북류(北流)로 무참하게 깨졌다. 고령진의 고령토를 연구해 가장 유사한 흙을 찾아 장석질을 보강한 유약으로 시유하여 고령토로 구운 것과 동일한 백자를 만들어 왔으나 이제 그곳은 황하가 삼켜버린 물줄기 속에 있었다.


황하 하류 물길 변화 역사 <출처: wikiwand>


손가락으로 튕겨보면 쇳소리가 날 정도로 경도가 높은 백자가 아니면 티그리스 강변의 사마라(samarra)까지 차(茶)들을 손실 없이 선박으로 운반할 수 없었다. 청자는 대양의 험한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깨지기 일쑤였다. 송나라가 일본에서 바그다드까지 차(茶)들을 송나라 선박으로 직접 운반할 수 없다면 이익은 크게 줄어들 것이 뻔했다. 가뜩이나 부족한 국가재정에 커다란 암운이 드리워졌다. 황하의 북류(北流)가 일어난 후 정요(定窯)뿐만 아니라 형요(刑窯)와 자주요(磁州窯)에서도 더 이상 만들어내지 못하는 백자들은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귀한 물건이 되었고 그런 귀한 걸 구했다며 자랑하는 애첩 앞에서 그 백자를 깨부수며 인종은 절망해야 했다. 무너진 하늘로 솟아오를 구멍이 없는 한 송나라는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하 하류 물길 변화 역사 <출처: 중국 국가지리>


※ 표지 사진 출처: 나무 위키 - 안록산 군대의 진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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