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국사 의천이 화폐 발행을 주도하다
1095년 왕위에 오른 숙종은 동생 의천의 건의를 받아 1097년 주전도감(鑄錢都監)을 설치하고 삼한통보(三韓通寶), 해동통보(海東通寶) 같은 주화(鑄貨)와 활구(闊口) 같은 은병(銀甁)을 연속 제작해 그것들을 거래 수단으로 사용케 하는 화폐경제체제를 구축했다. 국청사 화재 같은 사고로 인해 약속한 현물을 지급하지 못할 때 고려 일본 송나라 삼국의 차(茶) 거래가 마비되는 일이 재연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숙종은 차(茶) 같은 현물로 대금을 지급하지 못할 때 대안으로 활구(闊口) 같은 은병(銀甁)을 사용할 것을 제안해 송나라와 일본의 동의를 얻었다. 소상인들 간의 적은 물량이 오가는 거래 때에는 주화를 사용하도록 했다. 이처럼 은(銀)이 화폐로 통용되면서 물품들의 구입과 판매가 촉진되기 시작했다. 모든 물품들의 상품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은과 같이 확실한 기준으로 모든 물품들의 교환 기준이 정해지자 상거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은본위제에서는 동일 품목에 대해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승복할 수밖에 없는 단일 가격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은(銀)이란 금속은 차(茶) 나무가 자라는 땅을 찾기 위해 태초부터 이용되어온 금속이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금속이었다. 차(茶) 나무가 자랄 수 있는 유일한 땅은 질소가 풍부한 땅이었는데 은(銀)은 질산과 따뜻한 황산에만 녹았다. 이런 은의 성질을 이용해 사람들은 침출수에 은을 넣어 녹는지를 관찰했고 녹는 여부에 따라 정밀 탐사할 땅을 정하는 시금석(試金石)으로 사용했었다. 고려는 활구(闊口) 라는 은병(銀甁)을 차상인(merchant)들이 차를 거래할 때 사용하도록 강제했는데 송나라 철종은 송나라의 정책 변경으로 많은 손해와 고초를 겪은 고려 왕실에게 화폐 발행권이란 특혜를 주어 그 손해를 보상받게 해 주었다. 이로써 고려는 삼국 무역체제에서 기축통화(基軸通貨)를 운용해 화폐 발행 이익까지 챙기는 이득을 가졌다.
고려인들이 이런 이익을 누릴 때마다 소동파의 고려에 대한 비판은 점점 독해져 갔다. 독설은 점점 강력해졌다. “우리에겐 티끌만큼의 이익도 없는데 오랑캐는 엄청난 이익을 얻어간다.”(논고려진봉장) “오랑캐에게 다 주어 노비가 되게 했으나 저들에게서 우리가 얻은 건 무엇인지 모르겠구나” 소동파는 무역로(貿易路) 지배권이 얼마나 큰 이익인지를 모르는 문인이었다. 소동파는 송나라의 해상무역로 지배권 유지에 고려가 얼마만큼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는지 모르는 시인이었다. 유통(流通)이 생산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는 관료였다.
1101년엔 은병(銀甁)인 활구를, 1102년엔 해동통보를 주조하여 모든 차(茶) 거래엔 화폐만을 사용토록 숙종이 강제하자 마침내 진상(晉商)과 소그드상 연합체가 마린 로드(Marine Road) 무역상들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번엔 여진족들이 동원되었다. 1104년 실크 로드(Silk Road) 무역상들의 지원을 받은 동여진의 추장 영가(盈歌)가 고려를 침략해 들어왔고 결국 장군 임간이 그리고 윤관이 차례로 패전했다는 보고를 숙종은 들어야 했다. 숙종은 패전하고 돌아온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기마병과 보병 그리고 승려군으로 이루어진 총 30만 대군을 별무반이란 이름으로 조직했다. 시즈오카 차(茶) 중계무역을 통해 축적해 온 국가재정이 민족사 최대의 북벌 전쟁에 투입되고 있었다. 요나라의 침략 이후 실크 로드 무역상들과의 백년 만의 재대결이었다. 윤관은 제2의 강감찬이 되겠다며 결의를 다졌다.
※ 표지 사진 출처: 우리 역사넷 - 활구(闊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