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휘종이 역사를 억울해하는 이유
북송의 7대 황제 철종이 누구나 예상했듯 변법을 시행한 지 7년 만에 1100년 25살의 나이로 병사(病死) 아닌 병사로 죽고 그의 아들 휘종이 18살의 나이로 즉위했을 때 최대의 문제는 백자를 만들 수 있는 장석질이 많이 함유된 흙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장석질을 듬뿍 담은 축복 같은 흙들을 퇴적시켜 주었던 황하는 거란인들이 장악한 북쪽으로 흘렀기에 백자를 만들 흙이 결국 부족하게 되었다. 제방들을 쌓아 어떻게든 황하를 송나라 땅인 동쪽으로 흐르게 해서 백자를 만들 수 있는 흙을 얻으려는 송나라 사람들의 부단한 노력은 그러나 매년 제방이 무너지는 자연재해 앞에 허무하게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제방들은 결국 황하가 회수의 홍택호로 흘러가는 대재앙의 원인이 되었다.
휘종은 결국 회수(淮水) 이남 지역의 모든 흙을 황궁이 있는 변경(개봉)으로 보내도록 명령했다. 송나라 지배하에 있는 모든 땅의 흙을 조사하는 어마어마한 사업이 진행되었다. 즉위 초 자식을 낳으려면 도성 동북쪽 지세를 높여야 한다는 도사(道士)의 말을 따라 흙산을 쌓아 올렸고 급기야 10여 리에 이르는 산줄기를 형성할 정도였다는 사서의 기록은 휘종이 고령토를 찾기 위해 얼마나 노심했는지 증명해주는 기록이다. 백자 없이는 바그다드까지 차(茶)를 운반할 수 없고 그리되면 거머리 같은 서하와 요나라의 농간으로 송나라는 형편없는 이익률에 다시 재정위기에 몰리게 될 판이었다. 결국 멸망하게 되리란 걸 누구보다 잘 아는 휘종과 송나라 조정이었다.
고령토가 아니지만 비슷한 성분을 가진 흙으로라도 백자를 만들기 위해 항주에 명금국(明金局)을 설치해 실험을 계속했다. 화석강(花石綱)이라 하여 일정 기준에 해당되는 큰 암석들은 모두 캐내게 하여 대운하를 통해 수도로 운반하게 하고 이들 암석들을 조사했다. 조정에 이를 위해 응봉국(應奉局)을 신설했다. 고령석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온 나라를 고통 속에 몰아넣은 후에야 휘종은 고령토를 찾아냈다. 지금 행정구역상 안휘성 최남단에 있는 황산(黃山) 지역이었다. 서쪽으로 경덕진이 있고 남쪽엔 황산시(黃山市)가 있는 황산 지역에 휘종이 그토록 찾던 고령토가 있었다. 황산지역에 사는 백성들에 대해 고령토를 캐서 바치라는 공물 부과가 매년 과다하게 이루어졌다. 일본과 고려를 거쳐 수입되는 시즈오카의 막대한 양의 차(茶)들은 황산지역에서 캐낸 고령토로 구워진 백자들에 담겨 전 세계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송나라 국고가 은괴(銀塊)들로 넘쳐 쌓여갈 때 황산지역의 백성들은 넘쳐나는 고령토 공물량 닦달에 분노가 쌓여가고 있었다.
1120년 진상방(晉商坊)과 소그드 상방의 지원을 받은 방랍(方臘)이 결국 목주(睦州;안휘성 황산시, 순안현 淳安縣)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고령토 채굴에 진저리를 치는 인근 지역의 백성들까지 합세해 10만의 장정이 모이는 데는 열흘이 채 걸리지 않았다. 황소의 난 때 황소군(黃巢軍)들이 마린 로드(marine road)의 해양무역파 본거지인 복주와 천주, 광주로 파괴와 학살을 위해 몰려갔듯 방랍군(方臘軍)도 백자 생산기지인 신안강(新安江)과 부춘강(富春江) 유역을 훑으며 고령토 광산과 백자 생산지를 파괴하며 항주(杭州)로 진격했다.
※ 표지 사진 출처: 구글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