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의 배신과 요동치는 정세
송 황제 휘종(徽宗)이 여진족을 이용해 요나라를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밀어붙이자 송나라 조정에서도 걱정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올 정도로 송나라의 대외정책은 갈지자를 그리고 있었다. 백자 원료인 고령토를 찾기 위해 전 국토를 헤집는 과정에서 민심은 이반(離反)하고 있었고 황산(黃山)에서 출토되는 고령토를 캐기 위해 동원된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가고 있었다. 요나라에게 주던 은(銀)과 비단을 줄 터이니 요나라를 없애달라는 송나라의 요청을 아골타의 아들 금 태종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여진의 금(金) 나라에 거란의 요나라가 연전연패할수록 고려의 입지는 좁아져갔다. 고려에서 가공되어 송나라로 중계된 시즈오카 차(茶) 값은 송나라 상인들의 담합에 의해 형편없이 폭락했다. 요나라를 연패시킬 정도로 강력한 무력을 자랑하는 여진족의 금나라가 송나라와 우호적인 관계였다. 송나라가 요청하면 언제든 나서 주는 여진이었고 그럴수록 고려의 위상은 추락했다.
고려 숙종(肅宗) 때 왕실의 절로 지어진 많은 천태종단 사원(寺院)들이 재정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고 천태종단(天台宗團)의 차(茶) 유통망 또한 흔들리기 시작했다. 쪼들린 재정은 사찰과 사원의 무장경찰인 승도(僧徒)들의 해고(解雇)를 초래했고 승도들이 부족한 절들의 차(茶)를 보관하는 창고들은 도적들에게 털리기 일쑤였다. 훔쳐진 차(茶)들은 경원 이씨들을 대표로 내세운 문벌귀족 사원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법상종단(法相宗團)에 속한 다른 절들로 팔려나갔다. 숙종의 뒤를 이은 예종(睿宗)은 두 번째 왕비를 맞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위기에 몰렸다. 두 번째 왕비는 당연히 인주 이씨(경원 이씨) 가문의 여식(女息)이어야 했고 결국 이자겸(李資謙)의 딸이 간택(揀擇)되었다. 아버지 숙종이 택군(擇君)의 죄를 물어 처형한 이자의(李資儀)의 사촌이었다. 천태종단의 절들로 고려 왕실에 의해 지어져 시즈오카 차(茶)들을 그물망처럼 처리했던 사찰(寺刹)과 사원(寺院)들이 하나둘 법상종단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법당(法堂 :금당 金堂)의 현판(懸板)이 대웅전(大雄殿)에서 미륵전(彌勒殿)으로 바뀌고 있었다.
예종은 부왕 숙종처럼 남경(서울)으로 천도를 생각할 만큼 용감하지 못했다. 송나라의 압력에 굴복해 별무반(別武班)으로 정복한 동북 9성을 반환하는 순간부터 예견(豫見)된 일이었다. 아니 송나라의 해산(解散) 압력에 쌍수(雙手)를 들어 찬성한 문벌귀족(門閥貴族) 사원 세력(寺院勢力)의 동조에 항복해서 별무반(別武班)을 해산할 때부터 예측(豫測)된 일이었다. 압해도(목포 앞바다)를 통과해 벽란도로 들어오는 시즈오카 차(茶) 물량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왕실의 손해는 커져만 갔다. 해류(海流)와 바람의 변덕으로 명주(溟州:강릉)와 원산(元山)으로 입항한 배들에서 흘러나온 시즈오카 차(茶)들이 임진강을 통해 운반되고 있는 것을 알아내고 이들이라도 끌어 모아 가공 처리하기 위해 파주에 혜음원(惠陰院)을 지어 챙겨보았지만 물량은 늘 부족했다. 혜음원에 최고의 숙박시설과 주고(廚庫) 시설을 갖추고 일본에서 들어온 차(茶) 무역상들을 유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왕실이었다. 혜음원에는 최고의 차(茶) 가공과 보관 기술을 가진 승려들을 사찰에 배치하여 차(茶)를 가지고 들어오는 무역상들의 모든 요구에 부응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럼에도 일본에서 고려로 들어오는 차(茶) 무역상은 점점 줄어들었다. 고려 왕실은 또다시 위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1122년 예종이 죽었을 때 이자겸은 연부역강한 숙종의 아들들, 즉 4명이나 되는 예종의 동생들을 왕위 계승권에서 모두 탈락시켰다. 이유는 왕자들의 생모가 모두 인주 이씨 가문의 딸이 아닌 정주 류씨 가문의 딸, 명의 왕후였기 때문이었다. 숙종은 인주 이씨에게서 후사(後嗣)를 보지 않았다. 14살의 어린 예종의 아들을 왕위에 올렸다. 인종(仁宗)이었다.
※ 표지 사진 출처: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 - 혜음원 배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