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의 두 얼굴- 신주와 서긍
인종(仁宗)은 이자겸의 외손자였다. 1123년 서긍이 포함된 천여 명의 대규모 송나라 사신단(使臣團)이 예종을 조문한다는 명목으로 고려에 들어왔다. 그들은 도둑들에게 도난당해 법상종단(法相宗團)으로 넘어가는 천태종단(天台宗團)의 시즈오카 차(茶)들을 회수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신주(神舟)라 불리는 어마어마하게 큰 선박 두 척(隻)과 대선 6척에 원래 자신들의 소유물인 차(茶)들을 가득 싣고 그들은 떠났다. 신주라 불린 두 척의 큰 배는 신종 때 만들어진 배가 아니었다. 휘종 때 새로 만들어진 더 커지고 웅장해진 배들이었는데 이름이 <정신이섭회원강제신주(鼎新利涉懷遠康濟神舟)> 그리고 <순류안일통제신주(循流安逸通濟神舟)>였다. 당나라 때 태종의 비호(庇護) 아래 해상무역의 첨병이었던 천태종단을 압살 한 법상종단의 숨겨진 정체를 송나라 황실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이자겸의 세상이 된 고려가 누구의 손아귀에 들어갔는지도 파악했다. 1069년 송 황제 신종(神宗)의 희녕변법(熙寧變法:왕안석의 신법)으로 시작되고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구축된 50년간의 한중일 천태종 경제동맹이 끝나가고 있었다. 서긍은 비밀보고서에 고려의 유력인사들에 대한 신상정보까지 포함한 고려의 모든 실상을 오늘날의 사진인 그림까지 첨부해 정확히 기록한 후 휘종(徽宗)에게 보고했다. 송나라는 고려에 투자한 모든 것들을 손실 없이 그리고 빠짐없이 철수시킬 만반의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청기와 장수까지도…
서긍이 정사 노윤적(允迪), 묵경(墨卿)과 함께 사신으로 파견된 건 1123년이었다. 개경의 사신 숙소인 순천관에서 몇 개월 머물면서 고려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 군사 예술 기술 복식 풍속 그리고 인물들까지 조사해 그림들을 첨부해 황제에게 제출한 보고서가 고려도경이었다. 1124년 8월 6일 휘종에게 보고된 매우 섬세하고 관찰력과 정보력이 출중한, 40권으로 묶여진 이 방대한 분량의 책의 정식명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化奉使高麗圖經)이다.
1125년 아골타의 아들 금나라 태종은 요나라 마지막 임금 천조제를 사로잡은 후 송나라가 자신들을 배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낸 후 대군을 휘몰아 북송으로 진격했다. 그동안 변경(汴京:개봉부開封府) 이북으로 흐르며 북송을 북방 유목민으로부터 굳건히 지켜온 황하가 그 물줄기를 산동 반도 남쪽으로 흐르는 회수(淮水)와 합해진 것이 치명타였다. 1126년 1월 18일 송 휘종은 황위를 장자인 흠종(欽宗)에게 양위하고 수도 변경을 떠나 남쪽으로 도망갔다. 곧 송나라의 수도 변경(開封)은 금나라 군대에 포위됐다. 서긍이 고려도경에서 “널리 배우고 아는 것이 많아 글을 잘 짓고 고금의 일을 잘 알아 학사들이 믿고 따랐다… 김부식은 풍만한 얼굴과 석대한 체구에 얼굴이 검고 눈이 튀어나왔다”라고 정보 보고한 김부식이 이때 명주(지금의 영파)에 고려의 사신으로 와 있었다. 송나라가 금나라 군대에 어떻게 무너졌는지 현장에서 그는 목도했다. 수많은 피난민들이 수도 변경(개봉)에서 몰려들었고 그들이 전하는 소식을 믿을 수 없는 마음으로 그는 들었다. 시대는 황하의 물줄기가 변한 것처럼 순식간에 변해 있었다.
※ 표지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 고려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