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역맥파인더 Oct 24. 2022

이자겸 난의 진실

왕은 다르다- 인종(仁宗)은 어쩔 수 없이 왕이었다


24. 이자겸의 난


이 소식은 개경에도 전해졌고 이제 18살이 된 고려왕 인종은 이것이 뭘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숙종 이래 첨예하게 대립해 온 고려 왕실과 문벌귀족 사원세력 간의 승패가 이제는 가려져야 한다고 인종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실크 로드 무역파와 마린 로드 무역파 사이의 지난 50년간의 대립이 이제 그 결과를 가르려 하고 있었다. 무엇들이 어떻게 될지 이젠 가늠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왕이었다. 인종은 자신이 당하기 전에 문벌귀족 사원세력의 중추인 이자겸과 그를 보호하는 무신 척준경을 함께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翊聖同德推忠佐理 恊謨安社 亮節翼命功臣 守太師

中書令領門下尙書都省事 判史兵部 西京留守事 朝鮮國公


조부인 숙종 이래로 고려 왕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송나라 해상 무역파들이 지금 변경(개봉)에서 숙적 실크 로드 무역파들에게 후원받는 금나라 기병대에게 포위당해 있었다. 먼저 손을 쓰지 않으면 실크 로드파와의 오랜 결연(結緣)으로 법상종단을 통해 여전히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고 있는 문벌귀족 사원세력들에게 당할 것이 뻔하다고 인종은 생각했다. 1126년 2월 왕의 밀명을 받은 친위대가 황성에 있던 척준경의 동생과 아들을 죽였다. 이자겸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법상종단의 개경 본산인 현화사(玄化寺)의 주지(住持)로 있는 자신의 아들 의장(義莊)에게 현화사를 방어하는 무장병력 승도(僧徒) 300명을 출동시키게 해 척준경의 지휘를 받도록 했다. 그들은 인종과 왕의 친위대를 공격했다. 아들과 동생을 잃고 흥분한 고려 제일 검(第一劍) 척준경은 만월대 궁궐 건물들에 방화한 후 불길을 피해 달아나는 모든 이들을 도륙했다.


불타는 수춘궁(壽春宮)을 겨우 빠져나와 후원(後苑)에 선 인종은 이자겸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양위 조서(讓位詔書)를 지제고(知制誥)에게 쓰게 한 후 발표했다. 그럴 수 없다는 부왕(父王) 예종의 고명대신(顧命大臣) 최사전 앞에서 인종은 울었다. 지난 50년 함께했던 한중일 삼국 해상 무역파의 패배의 눈물이었다.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이수가 외쳤다. “어찌 감히 이공(이자겸)이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유생(儒生) 이수의 그 외침은 사무쳤고 반향(反響)은 컸다. 태태왕(太太王) 증조부 문종의 유학 진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양위 조서를 썼던 인종에게 이자겸은 끝내 무릎을 꿇으며 말해야 했다. “신은 두 마음을 품지 않았사옵니다.” 인종은 그러나 이자겸과 문벌귀족 사원세력을 믿지 않았다.


척준경과 이자겸의 사이를 이간질하여 병부상서 척준경이 이끄는 군부의 힘으로 현화사로 대표되는 사원 무장군(寺院 武裝軍: 승군僧軍)을 물리치고 이자겸을 영광으로 유배시킬 수 있었다. 이자겸이 영광에서 굴비라는 신조어를 만들고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궁궐 방화를 저지른 반란죄로 척준경도 정지상에 의해 탄핵(彈劾)되었다. 오월지사는 일시지공이나 이월지사는 만세지죄(五月之事一時之功 二月之事萬世之罪)라는 정지상의 상소는 인종의 마음을 흔들었다. 척준경은 섬으로 유배되었고 고려왕 인종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가야 했다. 송나라가 여진족의 금나라와 선린관계를 증대시키며 고려와의 동맹을 등한시하게 되자 과거 숙종과 예종은 남경 천도를 검토했었다. 모두 북방의 금나라와 동쪽에 있는 일본 시즈오카에서 들어오는 차(茶)의 가공과 무역로를 고려해 최대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장소를 찾으려 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고려 동쪽 가장 먼바다로부터 수입된 시즈오카 차(茶)들을 가공해 수출하기엔 개경은 너무 서북쪽에 있었다. 고려가 가공한 차(茶)들을 가져가던 송나라 무역상들은 이제 더 이상 오지 않았고 고려 차(茶)를 원하는 나라들은 너무나 먼 서쪽 바다 페르시아에 그리고 아랍에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고려의 경제를 계속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송나라 해상 무역파가 절대 필요하고 그렇게 필요한 송나라 해상 무역파를 되돌아오게 하려면 지금 송나라를 침략하는 금나라를 고려가 나서서 공격함으로써 금나라의 군사력을 동서로 분산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이자겸과 고려왕실 가계도  <출처: KBS1>



※ 표지 사진 출처: KBS1

이전 20화 서긍은 스파이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