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자주파가 아니었다
송나라를 돕기 위해서는 금나라를 공격해 금나라의 군사력(軍事力)을 동서(東西)로 쪼개 약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정지상과 김안의 상소 내용이었다. 송나라가 위기에 처한 지금 금나라를 공격해 송나라에 공을 세우는 것이 고려와 왕실에 득이 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금나라와의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서경으로 천도해야 한다는 정지상, 김안 등의 주장이 결국 조정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남경과 임안(지금의 항주)이 금나라 군대에 차례로 함락당해 황제(남송 고종)가 바다로 도망 다니던 당시 송나라의 형편을 보면 이러한 주장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으나 대륙의 상황은 급격히 바뀌어 1130년부터는 송나라의 명장 한세충과 악비의 활약으로 1134년엔 회수 이남지역을 금나라로부터 수복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태 발전은 1127년 이자겸의 난을 진압하고 정지상 등의 도움으로 척준경까지 탄핵한 후 고려왕 인종이 묘청(妙淸)과 정지상, 백수한, 김안, 이증부 등의 서경 천도파(西京遷都派)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 배경이었다.
인종(仁宗)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송나라가 빨리 회복해 해상무역파가 다시 예전처럼 세계경제를 주도해 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래야 인주 이씨로 대표되는 문벌귀족 사원세력에 짓눌려 있던 고려왕실이 왕실다운 위력을 회복했던 조부 숙종과 부친 예종이 다스리던 시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금나라를 선제공격해 전쟁을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논의였다. 송나라의 원조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진상(晉商)과 소그드상이 주축이 된 실크 로드 무역상들의 지원을 받는 금나라와 전면전을 벌인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인종은 생각했다. 인종의 이런 국제정세 감각은 1126년 금나라에 멸망당해 사라진 거란족의 요나라가 야율대석의 지도 아래 위구르의 영토를 경유하여 키르기스스탄에 서요(Kara Khitai)라는 나라를 세운 1132년 그 진가가 증명되었다. 요나라와 금나라 모두 실크 로드 무역상들의 지원을 받아 마린 로드 해상 무역상들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용병(傭兵)이라고 판단했던 인종은 요나라가 결코 그냥 멸망되지 않으리라 보고 그들의 귀추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야율대석이 위구르의 영토를 무장한 거란군을 이끌고 가로질러 무사히 서역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요나라가 실크 로드 무역상들과 어떤 관계인지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인종은 생각했다. 인종에게 그 소식은 위구르와 거란이 모두 소그드 상인들의 경제적 지원하에 용병으로 동원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대륙의 향배가 완전히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려 왕을 황제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칭제건원(稱帝建元) 또한 종사(宗社)를 위험에 빠뜨리는 섣부른 일이라고 인종은 판단했다. 금나라 태종이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주저하는 인종 앞에서 묘청(妙淸)은 금나라 정벌을 선언하며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1135년의 일이었다. 북송의 수도인 변경이 금나라 군대에 의해 포위되어 함락되는 걸 명주(항주)에서 똑똑히 목도한 김부식은 금나라와의 전쟁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결심했다. 묘청에 의한 반란은 김부식에 의해 단호히 진압되었고 서경 천도파(西京遷都派)로 불리는 송나라 지원파(支援派) 또는 대금(對金) 주전론자(主戰論者)들의 목들은 모두 잘려나갔다. 임안(항주)으로 돌아온 송나라 조정은 어려울 때 자신들을 돕자고 주장하던 사람들을 목 벤 고려의 배신을 기억했다. 1142년 남송 황제 고종의 밀지를 받은 송나라 재상 진회(秦檜)는 전쟁을 계속해 영토를 회복하자고 주장하는 악비(岳飛)를 반역죄로 처형하고 금나라와의 화약을 성사시켰다. 남송의 재상이 된 진회는 고려가 누려왔던 무역 특혜를 폐지하기 시작했다.
1146년 고려에선 인종(仁宗)이 죽고 아들 의종(毅宗)이 즉위했다. 1149년 금나라의 새로운 왕 해릉왕은 화약을 깨고 남송을 다시 침략하기 시작했고 남송의 고려에 대한 무역 특혜는 어쩔 수 없이 재개되었다. 남송과 금나라와의 전투는 1161년까지 계속되어졌다. 그러는 사이 모든 시즈오카 차(茶)들은 어쩔 수 없이 고려로 다시 수출되었다. 값싸게 물량을 확보한 고려는 벽란도에 들끓는 외국상선들에 가공한 차(茶)들을 비싸게 팔았다. 고려왕 의종은 이런 고려의 영화(榮華)가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의종(毅宗)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늘 똑같았던 고려의 영화(榮華)였기에 그저 계속될 줄로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