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고려와 일본의 초상
1161년 남송 공격을 성과 없이 계속하던 금나라의 해릉왕이 살해되고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다. 그는 전임 황제들의 계속된 남송 공격을 영구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금나라의 요청으로 평화 협상이 시작되자 협상을 반대하던 남송의 고종이 퇴위해 상왕으로 물러나고 송 태종의 자손이 아닌 송 태조 조광윤의 7세손이 황제로 즉위했다. 새로 황제가 된 효종은 1163년 금나라의 새로운 황제 세종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평화 조약의 체결로 마린 로드가 다시 열렸다. 그러나 시즈오카의 차(茶)는 이제 고려가 아닌 송나라 주산군도로만 향했다. 시즈오카의 차(茶)들이 오지 않는 고려의 경제는 활기를 잃고 침체일로를 걸었고 시즈오카에 차(茶)를 구하려는 고려 상인들의 발걸음은 악에 받쳤다. 시즈오카의 차(茶)를 놓고 고려 상인들과 남송 상인들의 다툼이 늘어났다. 천태종단의 협력정신이 남아 있는 일본 상인들은 고려로 물량을 주기 위해 은연(隱然)한 연대를 보여주고 있었다.
결국 고려에 투자된 모든 걸 철수한다는 결정이 마린 로드(marine road) 상방(商坊)에서 내려졌다. 철수 계획안은 이미 서긍이 고려도경을 휘종에게 올렸을 때부터 완료되어 있었다. 고려와 일본 그리고 송나라를 연결하는 1069년 이래의 천태종단 무역망은 찢어졌다. 1170년 고려에선 무신정변이 일어났다. 3년 후 고려왕 의종(毅宗)은 경주 왈패 출신 하급무사 이의민에게 허리가 분질러져 솥에 담긴 채 경주의 한 연못에 던져졌다. 이의민에 의해 저질러진 극단적 하극상으로 고려에서 질서(秩序)는 사라졌다. 1185년 시즈오카 차(茶)들은 모두 가마쿠라항(鎌倉港)으로 집산(集散)되어 전량을 남송으로 수출한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시즈오카 차(茶)를 전량(全量) 명주(영파)로 보내야 하는 명령을 철저히 이행하기 위해 쇼군(征夷大將軍, 정이대장군)이 통치하는 막부(幕府)가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군사정부(軍事政府)가 들어선 것이었다. 1163년 남송과 금나라 간 평화조약이 체결된 지 15년 만에 벌어진 경천동지의 변화였다. 동맹의 끝에 고려와 일본에 남은 건 군사정부였고 무단통치(武斷統治)였다. 결국 단 한 닙의 차(茶)도 이젠 일본에서 고려로 들어가지 못했다.
고려에 청기와 장수가 사라진 내력(來歷)이었다. 얼마 안가 고려엔 청자마저도 사라졌다. 차(茶)를 산동반도와 주산군도(舟山群島)로 수출하기 위해 필요했던 청자였기에 찻잎 가공수출산업에서 송나라가 고려를 제외시키자 청자에 관계된 모든 것들이 고려에서 사라졌다. 차(茶) 가공 수출 산업 진흥(振興)을 뒷받침하기 위해 특별히 조직되었던 향, 소, 부곡(鄕 所 部曲)은 그래서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청자 생산 기지였던 나주목의 강진 같은 지역엔 청자 생산을 위해 특별히 조직된 행정단위인 소( 所 )만 8개가 몰려 있을 정도였지만 하루아침에 그들은 거지가 되었다. 차(茶) 가공 수출에 관련된 여러 가지 특수 도급(都給)으로 일했던 전문 기술자들과 차(茶) 가공과 수송을 책임지던 사찰과 사원에 관계된 스님들과 승도들의 대부분도 실직자가 되었고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도공(陶工), 가마(窯) 제작공, 제탄공(製炭工), 시목공(柴木工), 조선공(造船工), 선원(船員)등 차(茶) 가공 수출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과 가족들이 기아에 허덕였다.
1176년 지금의 당진, 서산, 예산, 아산, 천안, 평택, 화성을 관할로 하고 있어 당시 고려의 최대(最大) 대송(對宋) 차(茶) 가공 수출기지였던 공주목(公州牧)은 명학소((鳴鶴所) 같은 차(茶) 가공 수출을 위해 특수 도급을 맡아 조직된 향, 소, 부곡이 모두 합쳐서 13개소나 되는 경제특구였다. 1170년 군부 쿠데타를 신호탄으로 모든 일감은 사라졌고 그래서 일자리를 잃고 굶기 시작한 사람들은 살기 위해 봉기를 일으켜야 했다. 망이 망소이의 난(亡伊亡所伊亂)은 신분해방을 위한 투쟁이 아니었다. 수탈을 일삼는 지주들에 대한 농민 반란은 더더욱 아니었다. 향, 소, 부곡을 해체하고 일반 행정단위인 군, 현으로 바꿔달라는 농성은 아예 생각지도 않은 일이었다. 망이 망소이의 난은 송나라의 동맹 배신에 대해 이럴 수는 없는 일이라고, 절대로 앉아서 당하지는 않겠노라고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동시에 파멸해 가는 고려의 차(茶) 산업을 보호할 적극적인 대책을 내놓으며 차((茶) 수출시장을 지키고 확대할 조치를 하나도 하지 않는 군사정권에 대한 백성들의 성토였다. 이 난(亂)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의 차 가공 수출 산업을 위해 특별히 설치된 향, 소, 부곡을 중심으로 엄청난 봉기들이 연속해 일어났다. 앉아서 굶어 죽을 수는 없는 사람들이 차(茶) 산업을 지키고자 일어선 그들로서는 막다른 선택이었다. 그들은 고려 무신정권에 의해 모두 살해당했다. 이는 송나라와의 백 년 동맹이 남긴 향, 소, 부곡의 사람들을 보상 없이 제거하기 위한 그들의 목적이 성공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무신난의 진실은 이것이다.
※ 표지 사진 출처: 구글 지도 - 일본 역사 최초의 군부독재 정권 수립과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