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그드 상방의 영원한 호구 - 기후변화의 희생양
의천(義天)과 선종(宣宗), 의천과 숙종(肅宗)이 만든 결단과 선택, 집중의 시대는 고려에 번영과 위기를 동시에 남겨놓고 그들의 죽음과 더불어 끝났다. 숙종의 아들 예종(肅宗)이 즉위한 지 2년 후 윤관은 오연총과 척준경과 함께 17만 명으로 이루어진 별무반(別武班)을 이끌고 여진족을 토벌하는 민족사 최대의 원정에 나섰다. 해상 무역파를 제거해야 할 때 실크 로드 무역파들이 언제나 사용하는 방법은 북방 유목민들을 동원한 침략이었다. 전가의 보도처럼 그들이 휘둘러온 이 방법을 이미 거란인들을 통해 뼈저리게 경험한 고려였고 그 경험에서 여진의 발흥 뒤에는 진상(晉商)과 소그드 상방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숙종이었다. 여진족이 처음 이빨을 드러낸 1104년 2월 전투에서 임간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이 패했을 때 숙종은 그들 뒤에 실크 로드 무역상들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여진족들이 더 커지기 전에 싹을 자르고자 즉시 윤관에게 토벌을 명했었다. 임간이 패한 바로 다음 달(1104년 3월) 군세를 정비해 토벌에 나선 윤관이 어이없게도 연이어 패하자 숙종의 경계심은 극도에 달했다.
문무 관리(官吏)를 제외한 말을 가진 모든 백성들은 신기군(神騎軍)에, 과거를 준비하지 않는 모든 백성들은 신보군(神步軍)에, 사찰과 사원에서 가공된 차(茶) 들을 지키는 경찰업무를 담당하는 모든 승도(僧徒)들은 항마군(降魔軍)으로 각각 편제되어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는 군사혁명을 일으켰다. 숙종이 재위 말년에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고려의 국방력은 결국 동북 9성을 쌓고 공험진 선춘령에 고려 정계비(高麗定界碑)를 세운 후 개선(凱旋)했다. 그러나 윤관 앞에 기다리고 있는 건 송나라 휘종 황제의 철군 요구였다. 여진족을 이용해 거꾸로 거란의 요나라를 멸망시키는 칼로 쓰겠다는 판단을 고집한 휘종이 여진 땅에 있는 고려군의 철군을 강력히 요구했다. 반대하던 윤관은 결국 고려 조정의 이름으로 해임되었다.
여진족 추장 아골타는 고려가 동북 9성을 돌려주고 철군하자 즉시 요나라와 전쟁을 벌여 송나라의 은덕에 보답했다. 그리고 금나라 초대 황제로 등극한 아골타는 자신을 살려준 윤관과의 약속도 지켰다. 고려를 절대로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아골타 재위 내내 지켜졌고 후대에서도 지켜졌다. 숙종의 혜안으로 키워진 별무반은 고려의 번영을 지켜냈다. 그러나 동북 9성을 돌려주고 철군한 후 별무반은 해체되었다. 해체를 요구하는 송나라의 요구를 신호탄으로 그동안 숙종에게 눌려왔던 경원 이씨를 중심으로 한 문벌귀족 사원 세력들이 한 목소리로 단합해 왕실의 무력(武力)인 별무반 해체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 표지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 북방 유목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한 소그드 상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