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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진 Feb 19. 2024

포크는 푸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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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를 자주 간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카페를 가서 인스타그래머블한 사진을 잔뜩 남기고…뭐 그런 이유를 생각했다면 아쉽게 됐다. 사실 나에게 카페 투어란, 그저 권태로운 익숙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에 가까워서. 물론 커피나 다른 다채로운 음료를 좋아하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보통은 카페를 가면 딱 음료 한 잔만 주문해 앉는다.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에 갈 땐, 그 한 잔을 꽤 오래 공들여 마시며 시간을 흘린다. 그렇게 해도, 워낙 규모가 커서 그런지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한 느낌이라 좋다. 은근 눈치를 많이 보는 성격이라, 커피 한 잔으로 몇 시간을 죽치고 앉아 있다 카페 주인의 눈초리라도 받는 날엔 쉽게 주눅이 드니까….특히 요 몇 년 간 자영업자들의 고충이 말이 아니었기에, 오천 원 언저리의 음료 한 잔 시켜 놓고 하루 종일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 손님이 얼마냐 얄미울지도 생각해야 했다.


그래서 내 나름의 타협점을 찾았는데, 그건 ‘고작’ 음료 하나만 시키진 말자는 것. 카페에 오래 머물 생각이라면, 디저트 하나 정도는 더 주문하자는 거다. 물론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거지만…그래도 이 정도면 썩 괜찮은 마음이라고 생각해 줬으면 한다. 더군다나 어차피 오래 있을 거라면, 빵 같은 메뉴로 어느 정도 배를 채우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요새 먹는 양이 꽤 줄어서, 빵과 커피 정도로 가볍게 한 끼 때우는 게 되려 편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건, 양심의 무게를 좀 덜어내고, 되려 주린 배를 더 채우는 일이다. 프랜차이즈가 아닌 아기자기한 예쁜 카페에서 시간을 보낼 땐, 이 방식을 꽤 애용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고민이 불쑥 튀어나오는데…그건 다름 아닌 ‘무엇을’ 먹어야 할 지에 대한 문제다. 다양한 케이크가 구비되어 있고, 빵은 종류가 너무도 많다. 베이글, 휘낭시에, 와플과 크로플…도 포함해도 되겠지? 거기다 스콘까지. 고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이 모든 메뉴가 하나같이 맛있다는 가정 하에, 고려하게 되는 가장 커다란 요소는 결국 가격이다. 그렇기에 혼자 카페를 갈 때, 나는 대부분 스콘을 주문하곤 한다. 아직까진 큰 이변 없이 스콘이 가장 저렴한 디저트라서. 어지간해선 음료보다 더 낮은 가격대가 형성된 빵, 그게 바로 스콘이다.


스콘을 먹을 땐, 당연하게도 포크가 함께 제공된다. 이런 디저트를 먹을 때 포크를 사용하는 건 대개 통념에 가까우니까. 그런데, 포크의 용도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 있을까. 바로 음식을 푹 찍은 다음, 그대로 들어올려 입에 넣는 것. 포크는 그렇게 쓰라고 만들어진 물건이다. 그러니까, 우린 포크로 스콘을 ‘내리찍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콘은 내리찍으면 갈라지고, 갈라지면 또 잘게 흩뿌려지며  부스러기가 되는 그런 빵이다. 스콘의 총량은 당연히 같겠지만, 나처럼 식기를 사용하는 데 서투른 사람들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많은 양의 스콘이 접시와 바닥에 흩뿌려지는 슬픔을 맛보아야만 한다. 고등학교 물리 시간에 배우는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에 관한 내용처럼…같은 총량이더라도 그 중 일부는 무질서하고 무용한 부스러기로 흩어져버리는 아픔을 겪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스콘은 애초에 70퍼센트까지만 디저트다. 그 30퍼센트의 엔트로피는 바닥에, 접시에, 내 옷자락과 테이블에 산산이 뿌려진 채 존재하다가, 어디론가 흩어져버리는 가루일 뿐이다. 이렇게 말하니 스콘에게도 미안하고, 더러워진 접시와 테이블을 정리하실 그 어느 카페 직원들에게도 송구한 마음이 생겨난다.


그래서 나는, 포크를 원래 용도와는 다르게 사용하기로 했다. 언제부턴가, 내게 포크는 쿡 찍는 것이 아닌 퍼 올리는 것이 되었다. 내리찍는 것이 아니라, 푸는 것이 되었다. 흩어진 부스러기들을, 나뉘어진 조각들을 오롯이 담아 입 속으로 가져가는. 그렇게 해서 옅어지거나 흩어지지 않고, 온전히 나의 주린 배를 채워주고 미각의 기쁨을 담당해 줄 ‘디저트’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이것이 뒤샹의 ‘레디 메이드’ 같은 예술적 혁명은 결코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겐 이 디저트를 ‘온전히’ 맛볼 수 있게 하는 기쁨으로 기능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가끔은 이런 식의 ‘전유’가 필요한 것도 아닐까 싶다. 대부분의 사물에는, 그리고 규범으로 정해 둔 생활의 양식과 언어상의 약속에는, 기본적으로 ‘이렇게 해야 한다’고 정해진 작동의 양식이 존재한다. 그런데, 어떤 때는 그게 너무도 답답하고, 심지어는 폭력적으로 보이는 순간이 있다. 수직으로 내리찍어 스콘을 바스라지게 만드는, 포크의 그 무자비한 힘. 그것처럼 우리의 생활과 언어 속에도 알게 모르게 누군가를 주눅들게 하고 움츠러들게 하는 ‘일반성’이 존재한다. ‘이건 이렇게 사용하는 거야’, ‘이 말은 이런 상황에서 관용적으로 쓰이는 거야’ 라는 암묵적 합의 아래, 어떤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가해지는 폭력 같은 것이 있다.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투박한 통념이나 소수자들을 가리킬 때 쓰이는 혐오가 만연한 표현들. 선과 악, 성과 속, 능력과 무능력을 거칠게 구획하는 어떤 사회적 잣대들. ‘그렇게 정해진 것’이라는 무성의한 설명 아래 얼마나 많은 ‘부스러기’들이 흩어지고 내동댕이쳐졌을지 생각하는 일은 역시 아프다.


나는 포크 뿐만 아니라 젓가락질에도 서툴다. 아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일반적’으로 정해진 젓가락질의 방식을 따라하지 못한다. 그저 내게 편한 방식으로 쥐고, 내가 하던 대로 음식을 집어 먹는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되었다거나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젓가락질에 있어, ‘교정’이라거나 ‘연습’ 같은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나를 괴롭히는 일도 없다. 그저 편한 대로 쓰고, 편한 대로 먹는 게 가장 중요한 것 아닐까. 가끔 내 투박한 젓가락질을 힐난하는 이들의 말 속에 새겨진 ‘규범’이라는 낱말은 나를 옥죄곤 하지만, 나는 끝내 무엇도 뉘우치진 않는다. 젓가락을 어떻게 쥐고 포크를 어떻게 사용하든, 여기서 ‘잘못’은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방식을 ‘평가’하는 사람들의 입술과 생각에서 비롯하는 거다. ‘이렇게 해야 한다’고 누군가에게 강요하는 것은 그 자체로 폭력이니까.


나는 포크를 내 방식대로 쥐고, 나의 고유한 포크질로 디저트를 즐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즐긴다’는 것. 그 맛을 향유하기 위해 시도되는 나의 전유, 그리고 나의 고유함에는 죄가 없다. 그것이 내 자리를 넘어 타인의 자리를 침범하고, 그의 옷자락에 부스러기를 묻히는 게 아니라면, 나의 포크질은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믿는다. 스콘이 맛나고, 그걸 입 속에 집어넣을 수만 있다면…사실 뭘 어떻게 먹든, 상관 없는 거 아닌가? 그러니 모두들, 통념에 맞추려 애쓰지 마시고 부디 편하게들 드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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