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중반쯤이었던 것 같다. 그 녀는 7살 연하였다. 스터디 모임에서 알게 되었는데 첫인상이 아주 선했다. 착한 토끼와 순한 곰을 섞어 놓은 듯한 느낌이랄까? 모임에서 몇 번 스치듯 만나다가 그 녀의 친구가 정식으로 소개해줘서 호감을 갖고 만났다.
첫 번째 만남은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헤어졌다. 두 번째 만남을 위해 전화를 했는데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이유를 물으니 휴대폰이 고장 났었다고 했다. 두 번째 만남에서 그 녀는 쇼핑을 하자며 휴대폰 가게를 향했다. 그 당시는 대형 쇼핑몰의 한 개층이 모두 휴대폰 매장인 곳도 많았다.
한참 동안 휴대폰 쇼핑을 하고 난 후 그 녀는 내게 휴대폰을 사 달라고 했다. 순간 당황스러움과 혼돈스러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짧은 순간이지만 깊은 고민을 했고 휴대폰을 사주지는 않았다. 그때 어떻게 거절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후로 한 차례 만남이 더 있었고 그 녀와는 인연이 아닌 것 같아 정리를 하려던 참에 그 녀의 친구에게 그 녀의 소식을 들었다.
" OO이 남자 친구랑 4박 5일 제주도 여행 갔어요. 아마 연락 안 될 거예요"
내 인생 통틀어 가장 쪽팔린 썸이었다. 그 녀는 아마 휴대폰 사주는 남자를 만났던가 보다. 그 후로 한 동안 연애질과 결혼이라는 제도에 회의(懷疑)가 들었다. 일견(一見) 좋은 여자들 다 시집가고 이렇게 구린 여자들만 남아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망연자실했다.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었다. 첫 번째 사랑은 사랑인지 모르고 지나가고, 두 번째 사랑은 사랑인지 알지만 지나가고, 세 번째 사랑이 진짜 내 사랑이라고.
그 후로 2년이 지나서 지금의 마누라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마누라와 연애초기에는 대체로 더치페이를 했다. 당시는 관행적으로 남자들이 대부분 데이트 비용을 냈는데 아내와 데이를 할 때는 꼭 한 번씩 번갈아 계산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아내와는 항상 밤 11시 전에 헤어졌다.
물론 과거의 썸녀도 지금은 좋은 남자 만나서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와는 인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연애와 결혼은 이렇게 상대적이다. 그 녀가 미치게 좋아서 두 번째 만난 날 휴대폰을 사주는 남자가 있었을 것이고, 희대의 금사빠들이 연분이 되어 만나자마자 장박 여행을 떠난 것이다. 물론 그 남자와 결혼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좌우지간 내 연애사의 최대의 오점을 남긴 그 사건은 지금 생각해도 불쾌하다. 나쁜 여자, 나쁜 남자 한번 만나지 않고 지나가는 청춘은 드물겠지만 조짐이 안 좋을 때는 바로 손절해야 한다. 아마 그때 그 순간 내가 핸드폰을 사주었다면, 나는 평생 내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거나 이혼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