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안 통하는 터키엄마, 안네

펜팔친구의 엄마와 단 둘이 먹는 튀르키예 가정식 아침식사

by 가니Gani

이스탄불 펜팔 친구네 집에 한 달을 얹혀살면서 가장 뿌듯한 변화가 있었는데,

바로 아침형 인간이 된 것과 아침을 잘 먹는 인간이 된 것이었다.


회사 다니던 시절에 끔찍이도 싫어했던 아침시간이

튀르키예에서는 행복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한국에서 워낙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해서일까,

아니면 이스탄불에서의 생활이 꿈만 같아서일까?

6시간이나 되는 시차는 나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이른 아침, 알람이 채 울리기도 전 눈이 반짝 떠진다.

휴대폰을 켜 시간을 확인해 보면 보통 7시,

펜팔친구의 사촌인 베튤이는 이미 빵가게 일을 도우러 갔고

굴샤와 세나는 출근 준비를 할 시간이다.


포근한 이불속에서 뭉그적거리며 바깥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사박사박 빠른 걸음으로 방 안을 오가는 소리,

가방에 물건을 넣는 소리,

가끔 피곤에 잠긴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도 들린다.


어수선한 소음들이 방문 앞으로 다가오며 점점 커지다가

철컥 -쿵! 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사라지면

온 집안에는 적막이 찾아온다.


고요한 아침, 친구들이 나간 집에는

나와 굴샤의 어머니, 할머니만 남아있다.


나는 굴샤의 어머니를 안네(Anne)라고 불렀다.

안네는 튀르키예어로 엄마라는 뜻이다.

굴샤네 어머니를 아주머니가 아닌 엄마라고 불러서일까,

친구들이 없는 집에 백수처럼 덩그러니 남아있는

조금은 황당하고 어색할법한 상황임에도

오래전부터 이렇게 살았던 것 마냥 마음이 편했다.


안네와 나는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았음에도 손발이 꽤 잘 맞았는데,

안네가 주방에서 요리를 시작하면 나는 옆에서 보조 역할을 했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아침식사에 엄청 진심이다.

아침 메뉴로는 빵과 샐러드, 치즈, 야채, 메인요리들이 오르고

한국에서 유명한 카이막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던 음식은

"수죽루 유물타(Sucuklu Yumurta)"라는 소시지 계란요리였는데

수죽 특유의 독특한 향신료 향과 계란의 조화가 환상적이다.


우리의 아침시간은 늘 수다스러웠다.

에크멕 암자(빵 삼촌)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내가 좋아하던 안네표 토마토소스를 만드는 방법

우리 가족들의 안부와 근황까지..


손짓 발짓, 아는 단어를 총 동원해서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는

결국엔 각자가 알아들은 대로 해석했는데,

안네와의 대화는 굴샤가 퇴근한 후 비로소 완성되었다.


"엄마, 가연이는 여동생이 아니라 언니가 한 명 있어. 한 살 차이밖에 안 난대"

"가연, 그 토마토소스는 사실... 엄마가 아니라 이모가 만든 거야."


오류투성이인 대화였음에도 안네와 나눴던 아침 수다는 항상 재밌었다.

서로 관심을 가지고 대화하면, 상대방의 언어를 전혀 이해 못 하는 상황에도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걸 그때 많이 느꼈다.


안네에게 나는 한국에서 온 막내딸이었다.

거울을 보고 외출 준비를 하고 있으면 안네는 조용히 다가와 옷매무새를 만져주셨다.

삐져나온 잔머리들은 안네의 손에 싹싹 넘어가고,

문 밖을 나서기 전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하면

안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폰을 가리키며 "굴샤!"라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그건 혹시나 길을 잃으면 굴샤에게 연락하라는 뜻이었다.


언젠가 굴샤에게 튀르키예 문화에 대한 신기한 정보를 들었는데,

그걸 듣고 나서는 튀르키예 안네들이 정이 많고 다정한 게

문화적인 영향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튀르키예를 포함한 이슬람 문화권 나라에는

"젖으로 이어진 형제관계"라는 뜻을 가진 "슛 카르데시(süt kardeşi)"가 있다.


어릴 때 내 자식이 아닌 아기가 자신의 모유를 먹으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일지라도 그 아기를 자식처럼 여기게 된다.

슛 카르데시끼리는 결혼도 금지되고, 말 그대로 가족이 되는데,

일부러 숏 카르데시를 만들려고 모유를 먹이는 경우도 가끔 있다고 한다.


굴샤에게도 슛 카르데시 관계인 오빠가 한 명 있다.

그는 굴샤네 가족과 어릴 적부터 많은 시간을 보냈고,

아직까지도 서로 챙겨주며 크고 작은 가족일에 참여한다고 한다.


생판 남도 내 자식처럼 사랑할 수 있는 문화가 있어서

안네는 나에게 넘치는 애정을 줄 수 있었던 걸까?


나는 비록 숏 카르데시는 아니지만 안네를 제2의 엄마처럼 생각했다.

튀르키예 여행을 다닐 때, 고급지고 좋은 걸 보면 한국에 있는 울 엄마 생각이 나면서도

동시에 이스탄불에 있는 안네 생각이 나서 결국에 똑같은 선물을 두 개씩 사곤 했고

내가 많은 사랑을 받은 것만큼 많이 돌려드리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었다.


튀르키예에서 맞이했던 아침들은,

맛있는 가정식 아침식사를 맛볼 수 있어서 행복했을 뿐 아니라

처음으로 엄마가 아닌 누군가에게 조건 없는 애정과 사랑을 듬뿍 받고,

나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아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배우게 해 준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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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에 놓인 수죽루 유물타. 내가 가장 좋아했던 아침메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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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에 담긴건 흑해 지방 음식인 무흘라마(Muhlama). 치즈와 버터, 옥수수 가루로 만든 음식인데 너무너무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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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친구들과 아침식사를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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