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영이 아버지의 사진 전시회를 준비하기 위해 액자를 맞추러 액자집을 가고 있었다. 신호등을 건너려고 광주시내에 한복판에 서 있던 그녀의 눈에 마침 띈 것은 남편이 몰고 가는 흰색 벤츠였다. 에린을 낳고 단 한번 에린의 호적문제로 만나고 이십 년 동안 그를 본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쉽게 눈에 띌 수가 있을까 싶었다. 에린의 아빠는 정확히 머리만 반백으로 변했고, 모든 이목구비와 표정은 똑같았다. 광대뼈가 불어진 얼굴에 잘생겨 보이지만, 너무나 기분파인 그 교묘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 남자의 옆에 있는 여자는 자기가 예전에 보았던 여자가 아닌 다른 여자였다.
해영은 순간, 에린의 아빠인 그 남자가 또 다른 여자와 살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때 해영의 다리에서 힘이 풀리고 자기도 모르게 신호등이 바뀐 것도 모른 채 빨간 신호등을 건너가고 있었다. 해영은 봄빛이 아른 거리는 횡단보도를 아무 생각 없이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때 에린의 아빠가 몰던 벤츠가 정확하게 해영의 옆구리를 치고 들어왔다.
해영의 몸이 하늘로 붕하고 날아서 에린 아빠가 모는 벤츠 앞에서 다시 탁 소리를 내고 떨어졌을 때, 운전을 하던 에린의 아빠는 그녀가 자기 전전 부인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해영은 에린에게 작별의 인사 같은 것도 남겨주질 못했다. 에린은 엄마의 사망 소식을 생전 처음 들어보는 아버지란 존재의 목소리로 들으며 광주의 병원으로 달려갔다. 에린은 택시 안에서 보이는 벚꽃이 만개한 가로수길을 보며 해영이 빌라 앞에 심어 놓았던 하얀 목련 나무를 생각했다.
엄마의 하얀 목련나무가 불에 타서 까맣게 죽어가는 모습을 언젠가 꿈을 꾸고 나서 하루 종일 울던 날이 떠올랐다. 그렇다 엄마의 목련나무가 하얗게 꽃을 만개해서 달꽃처럼 이쁜데, 갑자기 그 나무에 불이 붙더니 하얀 꽃들이 까맣게 재가 된 그 꿈처럼 엄마가 그렇게 이 봄날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에린은 그리고 어젯밤에 졸면서 녹음한 이상의 '날개'에서 굿바이, 굿바이 하던 이상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날개'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아마 어지간히 인생의 제행이 싱거워서 견딜 수가 없게끔 되고
그만둔 모앙이오 굿바이.
굿바이
에린과 에린의 아빠는 해영의 죽음의 인연으로 삼일을 함께 했다. 그 삼일의 장례식 시간은 에린과 에린의 아버지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고, 가장 불편한 낯빛만 교환된 시간들이었다. 더구나 에린은 아버지의 곁에 내내 따라다니며 사건을 처리하는 여자에게서 풍기는 이상한 향수 냄새가 견딜 수 없이 싫어서 그들이 장례식장에 오는 것에 대해 싫은 내색을 거르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드러냈다.
에린은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울분을 터트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삼일이 가고 슬퍼할 겨를도 없던 에린을 지켜주던 진수가 삼일 내내 자신의 차 안에서 토토와 잠을 잤다.
해영이 남긴 할아버지의 유고사진전을 에린은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에린의 아버지가 결국 그 사진전을 자기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고 싶어 하는 걸 알게 된 에린은 절망의 끝에서 다시 절망을 보았다.
그러나 진수의 도움으로 에린은 그 모든 사태를 수습하고 할아버지의 사진 작품을 다시 회수하여 진수의 차에 싣고 서울로 돌아왔다. 엄마의 광주 전세 아파트는 예전에 강진에 살던 빌라보다는 훨씬 작았다. 엄마는 30평 빌라에서 17평 전세 아파트로 이사를 했던 것인데, 그 집에는 할아버지가 물려준 피아노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파도 침대도 없고 식탁 하나와 피아노만 덩그러니 있고, 엄마의 옷 몇 가지뿐이었다.
에린은 엄마의 피아노를 짐보관소에 맡기고 나머지 살림을 다 정리했다. 그리고 토토와 원룸으로 돌아왔다. 에린은 토토를 안고 깊고 깊은 잠에 빠져 빌라에 심었던 목련이 붉게 타다가 검게 재만 남기고 타버린 꿈을 또 꾸었다. 에린은 엄마의 잃어버린 꿈들이 타버린 것 같아서 꿈에서 깨어나 무릎을 껴안고 새벽이 다 밝도록 흐느끼며 울었다.
그 주에 진수가 아파트를 내놓고 에린이 사는 원룸 동네로 이사를 왔다.
"너 혼자 토토 보려면 힘들 거 같아서 내가 같이 있어 주려고 그래. 나랑 같이 키우면 토토가 좋아하지 않을까?"
"고마워, 진수야. 토토도 내가 많이 울어서 싫은가 봐, 요즘엔 내 말도 잘 안 들어."
진수는 요즘 세윤에게 자주 전화가 오는 것을 에린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세윤이 서울에 올라와서 미대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것은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에린아 세윤이가 서울로 올라왔더라, 홍대 앞에 있는 입시 미술학원에 다닌다고 하더라. 집도 그 학원 근처라고 하던데."
"그래, 잘됐다. 세윤이 실력이면 홍대 앞에서 몇 달만 하면 원하는 대학에 갈 거야."
"네 안부 물어봤어. 엄마 돌아가신 거 알고 있다고. 나중에 같이 만나서 밥이나 먹자."
"좋아, 나도 세윤이 보고 싶다. 나 그 애 그림 좋아하거든."
에린은 세윤이 유난히 자기를 질투하는 것을 잘 알지만 더구나 세윤이 진수를 좋아하는 것도 알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에는 신경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 에린은 하루하루 학교를 다니고, 밥을 먹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실감하기도 힘들었기에 그 무엇도 관심은 없었다.
에린은 토토와 진수와 한강을 산책하고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고 가끔은 새벽에 깨어서 골목을 벗어나 조금 더 걸어 나가면 산비탈 언덕 위에 있는 교회에 갔다. 그곳엔 새벽에 기도를 하러 오는 신도들이 성경책을 끼고 새벽에 언덕을 걸어 올라오고 있었는데 교회 앞 벤치에서 에린은 그 사람들을 초점 없이 구경하며 벤치에 앉아서 교회의 십자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정도였는데 그녀에게는 그런 하루하루의 생활도 발끝이 떨릴 정도로 힘이 들었다.
'신이 정말 있기나 있는 건가? 신이 있다면 엄마는 어떻게 그런 죽음을 맞이해야 한 거지?
그리고 내게 아버지라는 그 사람은 어떻게 그런 악연의 주인공일 수가 있는 거지?
신은 그날 그 시간에 어디서 무얼 하셨기에 그런 드라마 같은 일이 있는 거야.'
토토는 에린이 그런 의문을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혼자 중얼대면 그녀의 품 안에서 낑낑대기만 할 뿐 그녀에게 어떤 위로도 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에린은 토토가 이렇게 새벽 시간에 따스한 체온을 자기고 자기 얼굴이나 손을 핥아주는 것만도 위로가 되는 것이 신기했다.
'토토 너도 없었으면 난 혼자 서울에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싶어. 고마워 토토
내 옆에 있어줘서. 그리고 네가 이렇게 나랑 이 시간에 잠도 안 자고 따라와 줘서.'
에린은 토토의 희고 짧은 털을 쓰다듬으며 토토에게 입을 맞춰줬다. 에린은 처음엔 토토와 뽀뽀는 절대 하지 않았었다. 비위가 약한 에린은 엄마의 익숙한 냄새 외에는 사람도 절대 가까이하지 않는 편인데, 이제 토토는 에린과 살짝 입을 맞추는 정도가 된 것이 에린도 이해가 불가한 일이었다.
그러나 에린은 아직도 진수가 손을 잡는 것 외에는 그다지 그에게 가까이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진수의 품에서 두 번이나 실컷 울었던 것은 엄마의 장례식장과 납골당에 엄마를 두고 오던 날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그와 뽀뽀를 하거나 그 이상을 생각한 적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에린은 진수와의 밀착된 어떤 연애감정보다는 다시 유튜브에 이상의 '날개'를 녹음하고 그리고 시를 쓰고 싶어졌다.
내게 배냇저고리 처음 입혀주신 분
흰 밥알, 하나하나 입안에 넣아주고 미소 짓고
까르르까르르
숨이 넘어가듯 웃던 날
내 이름 지으러 혼자 가서
순간, 호적도 서러웠다며
밤새 할아버지의 피아노 앞에 앉아서
우셨다는 그녀.
난 그분께 이제 무엇이라 부를까요.
아직은 말라버릴 수 없고
태울 수 없는
그리운 것들 너무 많아
불러도 애처로운 이름 하나
엄마.
그리고 엄마
당신, 또 그분.
그래서 당신은 보석,
반짝이지 않는 영원한 보석.
에린은 엄마의 짐을 정리하다가 손바닥 만한 배냇저고리가 들어있는 상자안에 엄마의 반지와 목걸이가 몇개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은 엄마가 자신에게 물려준 유산이란 생각이 들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