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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길주 Sep 04. 2024

장편소설         "노인과 유산"

2화. 그림이 유산의 전부라고요.

   



서영은 김박사가 숨을 거둔 후 한국에 도착했다. 두 오빠들과 가족들 친지들이 모여 김박사의 장례를 뜻하지 않게 치르게 되었지만, 누구든 그다지 큰 충격을 받지는 않은 정도로 김박사를 떠나보낼 수 있었다. 김박사 장례가 끝나던 마지막 날 민변호사와 서영 그리고 두 오빠 지성과 태민이 함께 모였다.


  민변호사에게 아버지의 유산 상속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들은 세 사람은 거의 기절할 듯이 민변호사 얼굴을 대했다. 백억이 넘는 아버지의 재산을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할아버지가 운영하시던 보육원에 전액을 기부하셨다는 것과 남겨진 아버지의 유산은 오직 그림 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 그림을 한 점도 팔지 말아 달라는 아버지의 유언이 담긴 유언장과 녹음 파일 등은 세 사람이 함께 커다란 콘크리트 벽 앞에 서 있는 것과 같은 답답한 느낌을 주었다. 벽을 부순다고 해도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이 벽을 부수지 않고는 너무나 답답하여 앞을 바라볼 수 없을 것만 같은 고통을 순간적으로 세 사람은 동시에 느낀 것 같았다. 그러나 제 일 먼저 마음을 가다듬은 것은 뜻밖에 서영이였다. 그녀는 아버지의 죽은 얼굴에서 그 어떤 때 보다도 환히 빛이 감도는 것을 보았기에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신에 대한 깊은 감사가 저절로 터져 나왔었다 ㆍ그래서  서영은 아버지가 천국에 가셨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런 아버지의 유언을 있는 그대로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 순간 섬광처럼 스친 것이었다.


 어떤 이성적 생각이나 세상의 법이 그 아버지의 환한 얼굴에는 전혀 없었던 것을 서영은 다시금 떠올렸다.

"아버지는 그럴 수 있는 분이시잖아요. 오빠들."

서영이 그 짧은 한 마디에 두 오빠들이 민변호사에게 더 이상 무엇을 캐묻지 않게 모든 것은 그 자리에서 마무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마무리는 또 다른 어떤 시작의 문을 여는 키로 변할지는 서영도 두 오빠들도 알지를 못했다.






 서영은 장례와 아버지의 유언에 관한 모든 절차들이 끝나고 세 사람이 아버지의 그림을 찾으러 민변호사를 앞세우고 오랫동안 아버지가 사용하던 작업실에 들어서자, 붉은 노을이 그리 크지 않은 자그마한 작업실 한 귀퉁이 벽에 오렌지색 물감을 칠한 듯이 지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홍시를 좋아하던 아버지가 남기고 간 듯이 작업실 벽에는 홍시 같은 노을빛이 작업실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어서 그 빛이 너무 황홀하고 아름다워서인지 두 오빠들도 선뜻 작업실 문을 열지 못하고 넋을 놓고 휑하니 겨울 마당에 서서 한참을 작업실 벽면을 쳐다보았다. 서영도 두 오빠도 그 홍시처럼 붉은 노을빛이 며칠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영혼처럼 느껴진 것이다. 작업실은 아버지가 아파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골 마을에 빈집을 개조해서 쓰고 있던 허름한 곳이었지만, 마당에는 장미와 백일홍, 달리아, 벚꽃, 칸나 그리고 이름을 다 알지 못하는 여러 꽃들이 사계절 내내 피어나서 서영은 아버지의 화실에 오면 언제나 꽃향기에 취했었다.

세 사람은 아버지의 작업실에 깔끔하고 완벽하게 포장이 되어 있는 그림을 보고 너무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림은 천 점이 넘었고, 작업실의 내부는 단단하고 견고하게 수리가 되어 있었으며 작품들은 하나하나 완벽하게 정리되고 포장되어 있었다. 세 사람이 아버지의 작품을 확인하고 모든 절차를 마치고 민변호사가 자기 차로 돌아가자, 두 오빠는 깊은 생각들을 하는지 말없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서영은 혼자서 덩그러니 아버지의 빈 아파트에 남아 있었다. 아들 차웅이를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은 지금으로서는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환자들 진료 때문에 오지 못한 남편도 오히려 옆에 없어서 너무나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서영은 지쳐있었고 힘이 들었다. 서영은 아무도 없는 아버지의 빈 집이 호텔보다 더 편안한 것이 참 이상했지만, 아버지의 존재를 느끼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모든 것을 비운 듯이 가벼운 마음이 그 아파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들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영혼이 바람처럼 가벼이 떠난 것처럼 서영도 피곤한 몸을 소파에 뉘이자, 그녀의 몸과 마음도 그리 가벼워질 수가 없었다.

"내 몸에 깃털이 있어서 날아가기라도 할 듯이 왜 이리 내가 가볍지."

서영은 혼자처럼 독백을 하고 아버지의 긴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이제는 삼십오 년 동안 외국에 살면서 그토록 치열하게 공부하고 스승들에게 사사를 받고 연주회를 하던 바이올리니스트의 삶을 내려놓고 한국에 들어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번뜩했다. 그리고 그녀는 순간 멈칫하며 몸을 일으켜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그렸던 할아버지의 초상화 앞에 앉아서 아버지의 작고 세밀한 붓을 손에 쥐었다. 할아버지의 초상화는 미완성이었고, 서영은 그 할아버지의 갸름하지만 견고해 보이는 턱선을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그려가기 시작했다. 서영은 살아있는 할아버지를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이젤 옆에 놓인 할아버지의 사진은 여러 번 본 기억이 확실히 있었기에 할아버지가 살아서 본 사람처럼 다정하게 느껴졌다. 서영은 갑자기 어디선가 바이올린의 줄 가운데 하나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와 동시에 그녀는 팔에 있는 힘을 다해 할아버지의 턱을  붓질 해나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사진속에서 진하고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서영은 큰 오빠가 낮에 아버지의 작업실에 하던 한 마디를 그때 다시 기억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닮지 않은 것처럼 살았지만, 결국 뼛속까지 할아버지를 닮은 사람이었어. 그 모습을 잘 몰랐던 우리만 아버지에게 속은 건가 모르겠다."


아버지의 검고 큰 눈동자가 깊게 흔들리던 때는 과연 어느 때였는지 서영은 그 순간 기억이 났었지만, 서영은 두 오빠들 사이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작업실을 나왔다. 그러나 서영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늘 할아버지의 보육원 이야기만 나오면 검고 큰 눈동자가 깊게 흘들렸었다는 것을...... 서영은 어릴 적 부터 일찍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밤 서영이 있는 방의 창가에는 짙은 겨울 안개가 내리고 다시 눈이 올 듯이 하늘이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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