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길주 Sep 09. 2024

장편소설           "노인과 유산"

4화. 엄마의 비밀의 화원




 서영은 여자의 눈물이 진한 커피향보다 깊다는 생각을 했다. 이 여자가 누구길래 자기 앞에서 이토록 깊은 눈물을 흘리는지에 대해서 서영은 참 낯설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살을 스치듯이 이 여자와의 어떤 인연이 자신의 감정에 폐부를 찌를 것만 같은 예감이 스쳤다.

"서영 씨, 갑자기 이렇게 찾아와서 미안해요. 서영 씨는 제가 누군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저를 집안에 들어오게 하고 따뜻한 커피까지 내주시고, 고마워요. 서영 씨"

서영은 여자의 목소리가 자신이 연주를 할 때 늘 함께 하는 첼로의 중후한 음색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정말 겨울을 닮았고, 첼로를 닮은 목소리의 여자 같았다. 표정은 겨울나무처럼 메말라 있는 듯하지만 첼로를 닮은 그 여자의 음색이 그녀를 참 우아하게 만든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네 저는 선생님이 누구신지 모르지만, 저희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렇게 저희 집을 찾아오셨을 때는 저희 아버지와 깊은 인연이 있으신 걸로 압니다. 더구나 저희 아버지 장례식에는 오지 않으시고 아버지가 사시던 집을 찾아오신 걸 보면 그 정도는 딸인 제가 생각을 해볼 수 있지요."

"네, 서영 씨, 맞아요. 저는 김박사님이 아니었다면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일지도 몰라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요."

"태어나서부터 저희 아버지와 연관이 있으시다고요."

서영은 그 순간 이 여자는 아버지의 연인이 아닌 다른 관계의 여자인가 싶어서 다시금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여자의 검고 큰 눈동자가 그 순간 깊게 더 흔들렸다.

그리고 여자의 목소리는 그때부터 약간 떨리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호흡이 조금씩 가빠졌다.

"서영씨가 오해하실까 봐 어쩔 수 없이 말하는 것도 있지만, 이제는 김박사님도 돌아가시고 안 계신데, 제가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해야 하는지 저도 제 마음을 모르겠어요. 하지만 서영 씨가 너무 충격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많이 떨리네요. 사실 여길 찾아올 때만 해도 그저 김박사님께서 사신 곳의 흔적만 보려고 문 앞까지는 왔지만, 서영 씨를 만난다는 것이 굉장히 망설여졌었거든요. 그런데 현관 앞에서 마주치니 제가 조용히 돌아갈 수가 없더라고요."

"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선생님이 저희 아버지랑 어떤 관계이신지만 말씀해 주시면 저는 좋을 것 같기는 한데 사실 그 이야기도 선생님이 원치 않으시면 안 하셔도 돼요."

 





 여자는 자신의 약간 도톰한 감색 스카프 끝을 매만지다가 그 스카프를 목을 돌려서 벗어버렸다. 여자의 길고 가는 목선이 어쩐지 삼십 년 전에 돌아가신 서영의 엄마를 닮았다는 생각이 서영은 그 순간 들었다. 엄마는 주름 하나 없는 긴 목이 곧고 아름다웠는데, 서영은 그 엄마의 그 긴 목을 닮지는 않았다.

"서영 씨, 저랑 서영 씨는 사실 같은 뱃속에서 나온 자매예요. 성은 다르지만요. 저는 윤 씨고 서영 씨는 김 씨지만 서영 씨 어머님이 제게도 친 어머니세요."

"넷 , 뭐라고요. 저희 엄마가 당신의 엄마라고요. 저랑 선생님이 한 뱃속에서 나왔다고요."

 여자는 난방이 잘 된 아파트 거실 식탁에 앉아서 떨기 시작했고, 서영은 그 순간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질렀다.

"당신 미친 사람 아니에요. 지금 초상집에 와서 무슨 망발이세요. 도대체 당신 누구야, 경찰에 신고하겠어요. 있지도 않은 우리 가족의 혈통을 더럽히는 이런 망발을 어디 와서 하시는 거예요. 더구나 우리 엄마 아버지가 다 돌아시고 없는데 이건 고인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요."

서영은 가슴이 벌렁거리고 심장의 고동이 거센 파도 위에서 난파된 배에 올라탄 듯이 뛰고 마음은 산산조각이 난 듯이 요동쳤다. 여자의 머리라도 당장 끌어내서 아파트 현관에 내동댕이 치고 싶은 심정이 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깊고 검은 눈동자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훔치며 서영의 분노에 찬 목소리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고 가만히 베란다로 내다 보이는 겨울 창밖을 바라만 보았다. 한참의 고요한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었던 것은 서영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뜨거운 커피를 다시 타 가지고 식탁에 다시 그녀와 마주 않을 동안까지도 그 여자가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진심으로 울었고, 서영은 그 여자가 그렇게 진심이 느껴지게 울고 있다는 것이 이 사건이 사실이라는 확증이 들자 정신을 가다듬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 친엄마의 딸이라니. 육십이 넘어 보이는 여자가. 그것도 목이 엄마를 닮은 이 여자가. 서영은 도대체 이 끔찍한 일이 왜 지금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 터진 것인지 도무지 종을 잡을 수가 없었다. 서영은 두 오빠들을 부르려다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버지가 그렸던 그림 중에서 이 여자를 본 것 같다는 생각이 그 순간 스치고 지나면서 서영은 번개를 맞은 듯이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갔다. 그럼 이 여자를 아버지도 안다는 것 아닌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