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질문이 하고 싶어서 물었다기보다는 이 기가 막힌 상황이 현실인지 꿈인지를 찾기 위한 사실확인이 필요했는데 그 순간 겨우 궁색 맞게 찾은 것이 엄마의 이름 석자를 아는지를 여자에게 물었던 것이다. 여자는 또렷하지만 정확한 이름을 댔고, 그것으로는 자신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증명하기는 힘들 거라는 것도 여자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영도 여자도 그 찰나 같은 순간에 알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서로 어딘지 강하게 끌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영 씨 저희 어머니는 저를 스무 살에 임신을 했다고 해요. 정말 원치 않는 임신이었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김박사님 모르게 저를 떼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고아원에 원장님이 그 사실을 아셨고, 나중에는 김박사님과는 헤어지는 조건으로 저를 낳게 해 주셨다고 합니다. 결국엔 헤어지지 못하고 두 분이서 결혼을 하셨지만요. 저는 사실 엄마가 자라난 고아원에서 저도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엄마는 저를 낳고는 고아원을 떠났던 것이고요. "
서영은 여자에게 갑자기 뺨이라도 한대 후려갈기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자기 엄마를 이런 식으로 치욕스럽게 만드는 이 여자의 이야기는 거짓인지 진실인지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 어떤 감정들이 이 여자를 향해서 자신이 강렬하게 내뿜고 있는데, 그것은 질투였다는 걸 서영은 알았기에 자신이 더 초라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서영은 결국 소리를 질렀다.
"저 죄송하지만 난 당신의 이 기괴한 스토리를 지금 듣고 싶지 않습니다. 머릿속이 너무나 혼란하고 괴로우니 죄송하지만 이 집에서 나가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제가 생각을 하고 정리해 볼 테니 여기 이 종이에 선생님의 전화번호만 하나 남겨 주시고 가시면 좋겠어요. 저도 지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네요."
"미안해요. 서영 씨를 너무 혼란하게 만들어서. 사실 다른 의도나 나쁜 생각은 전혀 없으니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어쩌면 당신께서 날 다시는 보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저는 김박사님께 항상 감사했고, 이제는 그분께 갚을 길도 없는데 왜 서영 씨에게 나의 존재를 밝히고 싶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너무 충격을 받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여자가 식탁 위에 놓인 하얀 백지 위에 전화번호를 남기고 떠났다. 잠시 어떤 사막에 회오리가 번지수를 잘못 찾아서 자기 집에 머물다 간 것처럼 모래폭풍의 흔적은 온 집안의 공기를 흐려놨다. 서영은 외투를 걸치고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도시 근처에 있는 강가를 향해서 달렸다. 겨울의 강은 어디쯤은 얼어 있었고, 어디쯤은 녹아서 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서영은 어디를 향해서 가야 할지를 모르고 운전대를 잡고 달렸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강 언덕에 카페가 한 곳이 보였다. 서영은 카페 앞에 차를 대고 그 카페문을 열고 들어서니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모여 아름다운 표정과 즐거운 표정으로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는데, 대다수 젊은 연인들이 모여 있는 카페였다. 서영은 그들의 웃음소리와 진한 커피 향이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것에 먼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서영이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멀리 창밖을 내다봤을 때 그녀는 좀 전에 만났던 여자의 긴 목덜미와 쌍꺼풀이 큰 깊은 눈매를 생각했다. 그 여자의 그 얼굴에는 엄마 하수영의 얼굴의 그대로 투영이 되어 겹치며 서영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살갗에 닿을 듯이 파고들어 옴을 느꼈다.
서영의 엄마는 오십에 세상을 떠났고, 살아 있다면 올해 팔십 세가 되어야 했고, 돌아가신 지는 삼십 년이 되는 해인데, 도대체 엄마가 스무 살에 낳은 딸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며칠이 안 되어 나타나다니 이건 연속극이라고 서영은 생각했다.
서여은 그때 사랑이라는 무게가 있다면 엄마의 사랑을 그 무게의 추에 달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도대체 엄마는 비밀의 화원에 몰래 꽃을 심겨두고 정원을 가꾸던 여자가 아닌가. 그런데 친딸 오직 자신만을 사랑했다고 믿었던 친딸인 자신보다 스무 살에 낳아서 고아원에 맡겨둔 첫딸인 그 여자분과 자기 중에 누구를 엄마는 더 사랑했을지 그 무게가 갑자기 서영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