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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길주 Sep 30. 2024

장편소설      "노인과 유산"

7화. 멀고도 가까운 사이




 숲을 멀리서 보면 산으로 보이지만, 그 숲을 가까이에서 보면 제각기 다른 나무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서영에게 남편의 모습은 늘 먼 산처럼 보였다. 가정을 이루고 살았지만 그 남자를 가까이 볼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질 못했다. 봄날에 곧 피어날 여린 나뭇잎처럼 감수성이 예민한 자신에 비해서 남편은 언제나 겨울의 고목나무처럼 딱딱하기만 했다. 겉은 여름에 푸른 나무처럼 아무 이상이 없어 보이는 남자였지만, 그의 내면은 언제나 겨울이었던 것을 그녀는 결혼하고 한 오 년쯤 살고서야 알게 된 것이다.

 그런 남편을 이제 다시 붙잡기는 어렵다는 것을 서영은 안다. 고목은 타고나서 재가 되면 그만이니 더 이상은 두려워할 것도 후회할 것도 없이 남편은 자신의 마음을 내어준 그 여자를 향해서 불탈 것이다. 서영은 음악방송이 나오는 라디오를 끄고 차의 핸들을 돌렸다. 남편이 있는 병원으로 가던 차를 돌려서 서영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는 아들을 학교에 태워다 주고 자신에 스케줄표를 보고는 여러 통의 전화를 돌렸다. 모든 공연과 개인적 약속을 취소하거나 아주 길게 미뤄놨다. 그리고 아들이 있는 학교에 가서 그녀는 그날 아들이 휴학을 할 수 있는지 자세히 묻고는 아들을 데리고 해가 질 무렵에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서영은 아들 차웅이를 데리고 우선 미국에서 떠나기로 했다. 외도를 한 남편이 거짓말을 하거나 아니면 솔직하게 말하면서 이혼하자거나 하는 모습을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지가 않았고, 자신의 삶을 다시 돌이키기 위해서는 남편과 우선 떨어져 생각을 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서영은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식탁에 쪽지를 한 장 남겨두고 아들과 함께 집을 나섰다. 당일에 떠날 수 있는 비행기표는 없었다. 서영은 아들과 함께 하룻밤을 공항 근처 호텔에서 묵기로 했다. 서영은 노을이 붉게 지는 호텔라운지에서 중학교 때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기 위해서 독일로 유학을 가기 위해서 김포 공항 근처 호텔에서 엄마와 하룻밤을 묵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자신은 엄마와의 사이가 완전한 모녀 사이라고 생각했었다. 엄마는 자신을 위해서 그 먼 타국도 언제든 가 줄 수 있고 그 모든 수속과 학교의 내용을 자신보다 더 상세히 알고 있었고, 기숙사와 그 나라의 훌륭한 연주자들에 대해서도 자신보다 아는 것이 훨씬 많은 엄마였다. 그런 엄마를 서영은 자신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서포트해 주는 여전사쯤으로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런 엄마에게 내가 아닌 나보다 열 살도 더 많은 언니라는 여자를 낳은 적이 있었고, 그 여자는 엄마가 죽은 지 삼십 년이 다 되도록 다른 자신과 다른 성과 이름을 가지고 한국 땅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이 믿을 수 없는 신화처럼 다시금 생각이 났다.

"어떻게 엄마가 나한테 그럴 수가 있지."

서영은 피곤해서 곤이 잠든 아들 차웅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며 침대 맡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남편에 대한 배신과 외도보다도 엄마에 대한 배신감이 더 쓰라리게 그녀의 감정을 깊이 파고들었다. 서영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자신에게 몰려온 이 거친 파도와 암벽들을 어떻게 무엇으로 부숴야 할지를 몰랐다. 그저 바람이 부는 대로 파도가 이는 데로 그녀는 자신을 바다의 한가운데에 던져 볼 생각이었다. 다만 한국에 있는 오빠들에게는 이 모든 사실을 당분간은 비밀로 하기로 했다. 아무리 친형제들이지만 자신이 확증되지 않은 진실을 털어놓고 오빠들을 마음을 폭풍 가운데로 던져두는 것은 여러 가지로 용납이 되질 않았다.






 더구나 아버지가 고아원에 기부한 백억 가까이 되는 유산에 대한 문제로 두 오빠들 사이에도 벌써 금이 가고 있는데, 엄마의 혼전 딸이 아버지 집에 찾아왔었다고 하면 아마 두 오빠들은 이미 고인이 되신 엄마와 아버지를 원망한다기보다는 그보다 더한 증오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서영은 들었던 것이다. 특히 큰 오빠는 어릴 때 자신이 엄마에게 사랑을 별로 받지 못했다고 늘 엄마의 사랑을 굶주려하지 않았던가. 이제 그들의 나이가 중년을 넘겼어도 그 허전한 마음의 끝에서 나오는 싹이 증오나 분노에 불씨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서영은 호텔방에 꽂혀 있는 핑크빛 장미꽃 향기에 잠깐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잠 속에서는 젊고 아름다운 엄마가 수천 가지의 꽃들이 끝도 없이 피어 있는 초원을 하얀 드레스를 입고 얼마전에 본 그 여자와 함께 거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서영이 그 여자의 손에서 엄마를 빼앗으려 해도 엄마는 자기손에 잡히질 않고 자기보다 더 나이가 많은 그 언니라는 여자의 손만 꼭 잡고 있었다. 서영은 울면서 엄마에게서 그 여자의 손을 빼앗려보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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