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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길주 Oct 07. 2024

장편소설        "노인과 유산"

 8화.  불행은 다시 새로운 문을 연다.

 


서영이 생각하는 인생은 굴곡이 그다지 없는 동그란 원과 같은 그림 이었다. 그 동그라미 안에는 언제나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들이 가득했고, 원하면 무엇이든지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유와 소유가 풍성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그 동그라미가 어느 날 인가부터 갑자기 한 구석이 흠집이 나고 모양이 구겨졌다.




 



그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부터였는데, 서영은 그 아버지의 부재가 자신의 인생에 가져다주는 이상할 정도의 어려움이 기차가 달리던 레일 위를 탈선한 것과 같은 큰 사고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서영은 우선 아들 차웅을 아버지가 살던 중소도시의 한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연약한 뿌리가 제대로 자라지도 않은 상태에서 차웅은 뿌리채 뽑힌 나무처럼 그렇게 한국의 조그만 소도시에 학교로 옮겨졌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우선은 엄마가 옆에 있다는 안도감이 아들을 별 탈 없이 한국의 학교로 옮길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이었다.


 서영은 혼자서 중학교 때 독일에 유학을 가서 학교 생활을 했던 자신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미국에서 한국의 소도시로 그것도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인 엄마와 함께 이런 시골에서 아들이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신문에 기사감이었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은 서영을 알아보는 신문기자는 없었다. 그리고 서영의 행보에 대한 기사가 아무런 사건도 없이 터져 나올리는 없었다. 누구든지 유명세를 타려면 큰 사건이 있어야 하지만 아직은 서영이 남편과 이혼을 정식으로 하지 않았고, 그녀가 공연 스케줄을 취소한 이유는 건강상의 이유로만 밝혔기에 미국에서도 그리 큰 험담이 음악계에서 터지지는 않았던 덕분이었다.

서영은 아들 차웅이 학교를 가면 혼자서 강가를 거닐거나 산에 산책을 다녔다. 추웠지만 그녀의 내면에서 일렁이는 불덩이 같이 뜨거운 어떤 감정들에 비하면 추위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빠들이 찾아와 서영을 닦달 아며 신상에 대한 자세한 조사를 하고자 해도 그녀는 별 말을 하지 않았지. 다만 그들을 안심시키고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서 따스한 차를 대접하고 한 끼 밥을 정성스레 차려줬다. 오빠들은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았던 그녀가 점점 한국의 다정한 여동생처럼 변해가는 것에 놀랠 뿐이었다. 언제 세계적인 명성이 있는 바이올리니스트인 여동생이 저리도 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상한 느낌과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남편의 외도를 눈치재지 못하는 오빠는 둘 중에 한 명도 없었다. 그런 눈치쯤은 살아가면서 나이가 먹으면 혈육지간에 당연히 알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서영은 바람이 부는 날이나 눈이 오는 날에도 홀로 길을 나서는 날이 많았다. 홀로 강이나 산을 걸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그런데 가슴 저 밑바닥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슬픔과 작은 기쁨들이었지 그다지 큰 슬픔이나 큰 기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서영은 아버지의 그림이 있는 화실에 가는 날에는 언제나 수요일이었다. 그 작은 시골 마을의 텅 빈 마당을 가로질러 아버지의 화실 문을 열 때면 그녀는 자신이 비로소 살아 있다는 생각에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다시 내 인생은 시작될 거야. 신은 그렇게 내 인생을 오래전에 예비해 놓으셨던 거지."

서영은 화실의 오래된 물감 냄새와 오일 냄새 그리고 아버지의 냄새가 너무나 좋았다. 그 냄새들은 그녀가 평생 동안 자신의 내부에서 오래도록 꿈꾸던 냄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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