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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길주 Oct 14. 2024

장편소설       "노인과 유산"

9화. 아버지의 제자라는 남자

 남자는 이상했다. 검은색 폴라티셔츠에 무릎이 해진 청바지를 입고 블루톤의 긴코트를 입은 남자는 아버지의 화실 마당에서 우두커니 한참을 서 있다가 사라지고는 했다. 서영이 이 남자를 발견한 것은 한국에 돌아와서 아버지의 화실을 찾아갔던 첫날부터였다. 서영은 차에서 내리기 전에 화실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이 남자 때문에 처음에는 차에 문을 꼭 잠근채 차 안에서 내리지를 않았었다.

아버지의 화실이 있는 시골 마을은 조용하고 전형적인 한국의 시골답긴 했지만, 처음 보는 남자가 아버지의 화실 마당에서 우두커니 뭔가를 생각하는 듯이 집과 하늘을 번갈아 보며 서 있는 모습은 그녀에게는 약간은 두려운 존재의 남자였지 호기심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경찰에 신고할 만큼 남자가 무섭거나 이상해 보이진 않았다. 남자는 사십 대가 조금 넘었을 것도 같은데, 그다지 젊지는 않았지만 얼굴색은 햇빛이 많이 그을린 듯해 보였고, 코가 날쌘 제비처럼 오뚝했다. 남자는 이지적으로 보였지만 어딘지 가난해 보이는 초라함이 풍겼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그림을 훔치러 온 남자 같지는 않았다.





 서영은 그 남자를 아버지의 화실 마당에서 본 것이 오늘로써 세 번째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차에서 내려서 남자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어서 그녀는 차문을 조심스레 열고 나갔다. 겨울의 햇살이 오래된 감나무의 등걸을 파고들듯이 따스하게 비추었다. 남자는 오늘은 차에서 서영이 내리는 소리에 놀랐는지 몸을 돌려서 서영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열 발자국쯤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가만히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서로는 무엇인가 모르게 안심을 하고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서영이 먼저 약간 수줍게 웃는 남자를 바라보고 말을 걸었다.

"저, 어떻게 오셨는지요. 저희 아버지 화실에 볼 일이 있으신가요?"

"아, 네 저 저는 강윤기라고 합니다. 김화백님의 제자입니다."

"네 저희 아버지의 제자시라고요. 그럼 그쪽도 화가신가요?"

"네, 저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죠. 김화백님은 제가 안지 십 년도 넘었는데, 제가 작년에 프랑스에 그림을 그리러 간 사이에 선생님이 돌아가셨더군요. 그래서 장례식에는 몰라서 못 왔거든요. 따님이시군요. 사진하고 똑같아서 금방 알아볼 수 있었어요. 반갑습니다."


 서영은 강윤기라는 남자의 목소리에서 진실이라는 색깔과 진심이라는 느낌이 정확하게 느껴졌기에 그를 아버지의 화실 안으로 초대를 했다. 현관문을 열고 낯선 남자와 아버지의 화실에 들어서는 느낌이 참 묘했다. 이상한 감정이 그녀로 하여금 마음을 진정시킬 차가 필요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서영은 남자와 소파에 마주 앉아서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남자는 자기보다는 훨씬 어려 보였고, 그 남자는 바보같이 어리숙해 보이는 표정의 남자였다. 날쌘 코가 그 어리숙한 표정에는 너무 어울리지를 않았다. 남자는 그러나 목소리가 아주 무겁고 느렸다. 그의 느린 말이 어리숙한 표정과는 참 잘 어울릴 정도로 그 남자는 결코 가볍지 않았고 그 남자의 느낌은 서영으로 하여금 아버지에 대한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 대상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으로 가득해졌다. 서영이 아는 아버지와 이 남자가 아는 아버지는 어떤 차이가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제라라고도 하고 십 년 이상 아버지를 만났다니 아버지를 잘 알 것 같기도 했다. 백억이 상 되는 전재산을 할아버지가 세우신 보육원에 기부한 아버지, 그리고 엄마의 과거를 자식들에게 털끝 하나 남김없이 숨기셨던 아버지,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자기와 성이 다른 언니라는 존재, 이런 일들을 이 젊은 아버지의 제지라는 화가도 알고 있기는 한 걸까 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상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붕붕 떠다니는 것 같아서 머리를 흔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에게 부엌 한 귀퉁이에 있던 사과를 먹겠냐고 하며 껍질도 벗기지 않은 사과를 씻어서 접시에 내주었다.

"미국에서 살던 분이라서 다르군요. 사과를 껍질도 벗기지 않고 손님에게 주시는 걸 보면요."

남자가 하얀 이를 시원하게 드러내며 빨간 사과를 베어 물었다. 서영은 그제야 자신이 사과껍질을 벗기지도 않고 손님에게 내준 것이 예의에 어긋난 건가 하고 의아해하며 그녀도 남자를 따라 웃었다. 남자가 사과를 먹으며 벽난로에 장작을 넣고는 불을 지폈다. 그리고는 거실 한 귀퉁이에 있던 아버지의 이젤과 물감을 펼치면서 빈캔버스에 물감을 칠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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