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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길주 Sep 23. 2024

장편소설.         노인과 유산

6화. 아물지 않은 상처는 흉터로 남는가.




 서영은 여자가 남겨 놓은 전화번호에 한 번도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여자가 다녀간 후 며칠 후 서영은  아버지의 아파트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후 그녀는 오랫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 대부분의 공연과 스케줄을 미루거나 취소를 했다. 서영은 이상한 늪에서 자신이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도무지 가늠하지 힘든 마음의 상처가 깊은 흉터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이 흔들리는지를 생각했지만 단순히 그 여자 때문은 아니었다.

 사실 서영은 아버지의 장례에 다녀오기 전부터 남편에게 여자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촉각이었다. 남편의 내면을 채워주는 어떤 존재가 분명히 생겼는데, 그 대상은 신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었고, 그 대상은 바로 여자라는 것을 서영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의 향기는 분명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부드럽고 아주 친절한 성품의 여자일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남편은 자기 보다 나이가 더 많은 여자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의 남편은 너무나 외롭게 자란 이민 2세였다. 남편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성공한 한국인 의사였다. 그러나 남편의 아버지는 그 성공이 주는 안락함을 누리기보다는 성공하기 위해서 받은 압박감과 스트레스로 모든 성공을 이룬 후에 새벽에 집에서 권총 자살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남편도 병원이 잘 되면 잘 될수록 굉장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을 서영은 알 수 있었지만, 서영은 서영대로 바이올리니스트로 성공해야만 했기에 그런 남편을 감싸줄 여유는 없었던 것이 둘 사이의 장벽이 생긴 이유였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남편은 그 장벽을 뛰어 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외로움을 이겨낼 장벽을 넘는 순간 남편은 어딘가 모르게 성숙한 사람으로 변해지기 시작했다. 한쪽 구석에서 부모님의 눈치를 보던 아이가 갑자기 활발하게 집밖에 가서도 잘 노는 것 같이 남편은 병원에 나가를 것을 즐거워했고, 분명 그 여자는 병원에서 같이 일하는 간호사나 직원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남편의 성격상 환자를 사랑할 것 같지는 않았기에 서영은 남편이 기대고 있는 대상은 분명 자신의 일을 도와주는 간호사가 분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병원 일을 안정되게 할 수 있으며 자신의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여자라면, 이미 그런 남편을 붙잡기에는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서영은 스스로 하고 있었다.


 남편의 외도, 아직은 분명하지 않은 그림자 같은 형체를 붙잡고 내가 이토록 힘든 걸까, 서영은 드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공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새벽 다섯시에 산책을 나온 것은 서영에게는 처음이듯이 남편이 그 시각까지 집에 오지 않은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허니, 내일은 내가 병원에서 밀린 서류를 봐야 하니 좀 늦을 수도 있어요. 당신은 날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요. 장인 어른 장례치르고 당신 너무 힘들어 보이니까 내가 들어오는거 신경쓰지 말고 푹 자도록 해요. 내 걱정은 말고. 차웅이랑 저녁에 맛있는거 먹고."


 서영은 남편에서 먼저 이혼서류를 보낼까를 망설이며 공원 한쪽 귀퉁이에 쌓여 있는 하얀 눈을 주먹으로 감싸 쥐었다. 차가운 눈얼음이 그녀의 손바닥에서 얼음조각처럼 붙어 버려서 손이 너무나 차가워졌다. 그녀는 긴 명품 파커에 손을 다시 깊이 찔러 넣고 집으로 돌아와 거실 페치카에 불을 지폈다. 집안은 금세 붉고 아름다운 페치카의 불빛으로 따뜻해졌고 그녀는 주방의 커피머신에서 에스프레소를 한잔 내렸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의 핸드폰 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몇번의 신호가 길게 이어졌지만, 남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서영은 불현듯 남편이 사고가 난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럴리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예감을 믿었고, 그녀는 남편을 다시 붙잡아야 할 어떤 실마리도 자신에게는 없는 것 처럼 자신이 초라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치만 자신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남편을 허망하게 바다에 물고기를 놔주듯이 그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는 마음에 그녀는 남편이 있는 병원으로 차를 몰고 달렸다. 자동차에서 아침 6시에 시작하는 음악방송 프로그램에서 오래전에 들었던 해리 닐슨의 Without You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서영은 노래가 흘러나오는 한 소절을 붙잡고 그 순간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나는 살 수 없어요, 당신이 없는 삶이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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