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은 아버지가 그리다 만 할아버지의 초상화를 고치고 또 고치며 사진 속에 얼굴을 몇 날 며칠을 그렸다. 아버지의 장례보다 할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은 훨씬 더 그녀의 감정과 온몸에 힘을 쏟아내야 하는 일이었다. 한 번도 그려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 그림을 그녀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 자신에게 놀라웠고,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이상하게 아버지의 얼굴에 투영되면서 그녀에게는 오래전부터 같이 살았던 가족 중에 한 사람 같이 느껴졌다. 세찬 눈발이 날리고 어느 사이 일주일이 흘러갔지만, 그녀는 미국에 가족들에게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를 않았다. 서영이 카페에서 모닝커피 한잔을 테이크 아웃해 들고 아파트 현관 앞에 들어섰을 때 검은 롱코트를 입은 중년의 여자가 아파트 앞을 서성이는 것이었다. 여자는 문 앞에서 벨을 누를까 말까를 무척이나 망설이는 듯하다가 서영을 보고는 기절할 듯이 놀랬다.
"누구십니까?"
서영이 여자가 너무 놀라자 약간의 위협조처럼 상대에게 강하게 의문을 품는 목소리를 내자 여자는 서영의 눈을 정확하게 마주 대했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서영은 아버지에게 여자가 있었구나 하는 것을 직감했다. 여자가 느끼는 직감으로 분명 이 여자는 아버지와 어떤 감정의 교류가 있는 여자가 분명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서영은 경계심을 풀기로 하고 여자에게 공손히 들어오라고 하며 현관문을 열어 줬다. 아버지에 대한 예의, 그것도 죽은 아버지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로 여자를 대해주고 싶은 마음이 일었던 것은 서영도 알 수 없는 마음이었다. 여자는 미인은 아니지만 참 단아하고 예쁜 여자였다. 육십은 넘어 보였지만, 살결이 고운 것이 고생이라고는 전혀 해 본 적이 없는 우아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해요, 김박사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저도 많이 놀랬는데, 장례식장에서는 사람들이 많아서 제가 갈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따님이 왠지 집에 아직 계실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찍 집을 나왔는데, 만나서 다행이에요. 서영 씨."
여자가 자기를 부르는 '서영 씨'라는 호칭이 참 낯설기도 하고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아서 서영은 여자의 하얀 볼에 몇 개쯤 올라앉은 까만 주근깨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저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왜 드셨는지 궁금하긴 한데 선생님께서 말씀하지 않아도 저는 조금 알 것 같아요. 저희 아버지 많이 좋아하신 분이시죠. 어떻게 되시는 사이인지는 몰라도요. 또 제가 이제 와서 두 분의 관계를 묻는다는 것도 프라이버시상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선생님을 위해서나 아버지를 위해서나 두 분 다를 위해서 굳이 묻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관계를 딱히 정해놓고 규정할 수는 없으니까요."
서영은 자신이 하는 말에 여자가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한편으로는 자신을 속이는 것과 같은 미묘한 감정이 동시에 교차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엄마가 아닌 다른 느낌의 여자가 아버지 옆에 있었다면 어떤 관계로 있었을지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너무나 깔끔하고 엄마를 끔찍이도 사랑했던 아버지에게 이 여자는 어떤 여자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자 궁금증과 동시에 약간의 분노 같은 감정도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더구나 팔십 오 세에 죽은 아버지의 육십 대 여자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드라마 중에 드라마가 아닌가. 그러나 서영은 침착하게 여자를 대하리라 마음을 먹고 여자에게 커피를 냈다.
뜨거운 커피가 겨울을 삼키고 아버지의 죽음을 가라앉히듯이 조용히 식탁에서 달콤한 향기를 뿜었다. 커피잔에 손을 댄 여자의 손이 곱고 가늘었다. 여자가 그 순간 식탁 유리 위에 하얀 눈물방울을 툭하고 떨어트렸다. 그리고 가늘고 힘이 없어 보이는 어깨를 들썩이며 한참 동안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서영은 이 여자가 누군지 함부로 생각하면 죄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 순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