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9

제목 : 어느 겨울 저녁 풍경

by 권길주



저녁이 오는 시간 아직 전등을 켜지 못했다.

붉은 석양

너는 나를 방안에 두고 홀로

작은 도시를 허리처럼 감싸며 지고 있다.


오늘은 엄마의 생신날,

그저 풍경처럼

내 삶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또 스쳐갔다.


혼자 사는 딸 때문에

아직 생을 포기 못한다는 엄마에게

두꺼운 털모자를 씌우고 우리 가족은

점심에 고기를 먹었다.


워커를 끌고 기우뚱 겨우 몇걸음 걷지만,

외식은 참 좋아하시는 엄마.


외식하는 날은

엄마가 외출할 수 있는 유일한 날이다.


여동생에게 엄마를 맡기고

다시 내 아파트로 돌아와

꿈을 꾸듯 잠깐 낮잠을 잤었다.


그리고 저녁내내 거실과 서재에서 불을 켜지 못하고

건너편 창가에 불빛만 바라보며

커피가 식은 줄도 모른다.


보라빛 꽃들이 만개했던 도라지 밭

열 다섯 첫 월경을 시작한 소녀들의 수근거림

과수원과 과수원 사이에 외딴 집들


집은 네채 밖에 없었고,

그 작은 동네 마당 한가운데 펌푸식 우물이 있었다.

갑자기 20년이 넘도록 손을 놓고 있던

시나리오가 써 보고싶다.


첫 씬은

사십대의 엄마가 박꽃같이 하얀 얼굴로

사과밭에서

중 2 소녀가 처음으로 쓴 시의 첫줄을 읽고 계신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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