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마을을 벗어나 바람을 쏘이러 나오니 초겨울의 햇살도 우리를 마중 나온 듯 따사로웠다.
나는 운전을 못하니 누구의 차를 타던 늘 손님이요, 누가 나를 차에 태워서 어딘가로 가주면
그보다 고마울 데가 없는 게 요즘의 내 신세다.
더구나 옆집에 젊고 아름다운 이 화가분이 운전도 잘하니 난 가끔씩 이 화가하고 나들이를 할 때면
애인이라도 되는 듯이 들떠서 마냥 혼자 운전석 옆에서 떠들어댄다.
물론 나보다는 나이는 조금 아래이긴 해도 내가 너무 격의가 없을 정도인가 싶어서
에쿠쿠 시골 아낙네처럼 떠들지는 말아야지 할 때도 있지만,
우리는 대화가 잘 통하는 편이라서 하루 종일도 같이 있으며 같이 작업을 할 때도 있다.
나는 올 2월에 엄마집이 있는 시골 마을에 이사를 왔고, 전원주택부지로 만들어진 곳에 약간은 허술한
전원주택 하나를 월세로 얻어 놓고 그곳을 나의 작업실로 만든 것인데, 처음에는 앞집에 사는 노부부 (화가 할머니와 할아버지) 집 말고는 아무도 살고 있지를 않았었다.
전원주택은 다섯 채가 있었지만, 집은 하나도 팔리지도 않았고, 내가 세 들어간 집도 마무리 작업이 한 끝난 상태라서 난 3월이 넘어서 그 집에 들어가 내 노트북을 펼치고 있었다.
낮에도 약간은 무서울 정도로 적막하고 사람이라고는 앞집에 할머니 할아버지만 가끔씩 정원에 서 계시며 봄날의 햇살을 즐기실 뿐이었다.
그때 너무 반갑게도 내 옆집에 비어 있던 전원주택에 훨친한 키에 아리따운 화가가 이사를 온 것이다.
어찌나 반갑던지..... 가뭄에 단비라고.
시골에서는 사람이 그저 가뭄에 단비다.
더구나 젊은 사람이 이사를 오면 대 환영인데, 나처럼 글을 쓰는 작가로서는 화가라니... 너무너무 반가운 친구가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금세 나이를 살짝 초월하여 친구처럼 지낸다.
옆집에는 세컨드하우스로 전원주택을 쓰고 있는 젊은 화가가 살고 앞집에는 할머니 화가가 살고.... 난 원래도 그림을 좋아해서 사실 작가보다는 나 역시 화가가 되는 게 여고시절의 내 꿈이었는데, 느지막하게 그림이라도 그려보고 싶은 심정이다.
여고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미술 선생님이셨는데, 난 그때도 그림을 못 그리면서 미술부활동을 열심히 했었다. 그리고 나는 대학을 다니면서도 가끔씩 그 미술 선생님을 친구와 같이 만나서 선생님이 사진을 찍으러 가실 때 바다를 따라가기도 했었다.
여고 시절 나는 담임 운이 좋았던 것 같다. 고 2 때는 미술 선생님이 담임 이셨고, 고 3 때는 아나운서가 꿈이었지만 면접에서 떨어지고 선생님이 되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나오신 국어 선생님이 담임이셨다.
고 3 때 담임 선생님은 우리가 고3인데도 아침이면 꼭 7시 30분 정도면 학교에 오셔서 칠판에 시를 꼭 한편씩
분필로 써 놓고 교무실로 가셨다.
그때 매일 아침 읽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와 내가 이름조차도 잘 모르는 불란서 시인들, 영국 시인들,
미국의 시인들.... 정말 그분은 우리의 교과서에 없는 시인들의 이름과 시를 칠판에 적어 주셨다.
그러나 내가 좀 더 시를 더 사랑하고 시를 읽어가던 대학 시절에 나는 그때 우리 고3 담임 선생님이 칠판에 적어준 시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 시들이었나를 도서관에 있는 시집들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목소리가 정말 아나운서보다 더 아나운서 같으시고 양복이 너무 잘 어울리시던 고 3 담임 선생님은 아나운서를 포기하고 시인이 되시길 원하셨는데, 난 아직도 그 선생님이 시인이 되셨다는 소식을 듣지를 못했다.
슬프지만 슬픔을 감출 줄 알았던 미술 선생님은 아픈 아내와 아픈 자녀를 데리고 살았었는데, 선생님은 내가 방송작가로 활동하던 어느 날 저 세상을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시인이 꿈이셨던 국어 선생님은 아직 살아계실지도 모르는데 나는 아직 선생님을 찾지 않고 살고 있다.
대학 1학년때 고 3 때 담임 선생님 집을 친구들과 방문했을 때 그때 선생님의 사모님이 흰색의 한복을 입고 계셔서 우리는 정말 깜짝 놀랐던 기억만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요즘 세상에 집에서 한복을 입고 생활하시다니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알고 보니 선생님의 집은 아주 오래된 고택에 사셨는데, 우리나라의 유명한 문화재급 고택이었으니 선생님도 집에 계실 때는 한복을 입고 계시고 흰 고무신을 신고 생활을 하신다고 하여 우리는 깜짝 놀랐었던 기억이 난다. 그날도 선생님은 양복이 아닌 흰색의 모시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계셨었다.
우리는 매일 불란서 배우 같은 양복을 입은 선생님과 봐왔던 터라 여름이라서 흰색의 모시바지저고리를 입고 계시는 선생님은 참 낯설어 보이기도 했었다.
나와 내 친구들은 그 당시 왜 담임 선생님 집까지 그렇게 찾아다녔는지 나는 지금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나는 학교 생활에 적극적이지도 공부에 열심도 아니었는데,
아무튼 그렇게 고2와 고3의 담임 선생님 집을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요즘은 코로나 이후로 친한 친구의 집이나 아는 지인의 집을 방문하는 일은 참 드문 일이 된 것 같다.
핵개인이란 낯선 말도 생길 정도니 요즘 세상은 얼마나 개인적인 삶을 살아가는 시대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요즘도 이렇게 마음에 맞는 화가나 이웃들이 때때로 내 주변에 살고 있음에 감사한다.
사실, 옆집에 화가분의 갤러리가 내가 살고 있는 시골마을 근처에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거의 매일 와서
죽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이렇게 넓고 조용한 곳에 카페를 차려놨으니
나로서는 내 작업실 옆에 이 갤러리가 없는 것이 너무너무 아쉬울 뿐이다.
비안리란 예명을 가진 이 화가는 젊어서는 서울에서 유명한 의상디자이너로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모래로 하는 추상 작업을 하는데, 이 큰 개인 작업실을 얼마 전에 카페와 갤러리로 바꾸었다.
내가 추석에 코로나에 걸려 혼자 작업실에 누워만 있을 때 화가분이 맛있는 스테이크와 인도 카레를 요리해서
갔다 주었는데 나는 그때 이분의 음식 솜씨를 알아봤다.
나로서는 흉내도 못 낼 솜씨였다.
나는 옆집에 화가에게 선생님 다른 건 하지 말고 그림 작업만 하세요,
화가라는 직업에만 몰두하세요.
참 나로서는 주제넘는 조언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나는 내가 몰두하고 몰입하지 못하는 글쓰기를 이분에게는 강요 내지 닦달을 하는 느낌도 있다.
왜지? 하고 나는 가끔 우리의 대화를 살피다 보면
그건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얻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나도 글만 쓰고 싶다.
책 읽고 글 쓰고 여행하고 갤러리 투어하고 그림도 가끔 그리고
사진도 가끔 찍으러 다니고
왜 하기 싫은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해야 하지......
거기다 내일부터는 김장까지.......
나는 살림이 귀찮다.
요리하는 건 좋아하지만 하루에 한 두 가지만 하고 싶고,
나머지 살림은 정말 하기가 싫어졌다.
글을 쓰는 일도 하루에 집중해서 6시간 내지 8시간만 하고 나머지는 쉬고 싶고
놀고 싶은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요즘 내가 살림을 하고 병간호를 하고.... 이러고 살고 있다 보니
글만 쓰라고 하면 참 좋겠다 싶은걸 어쩌면 옆집에 젊은 화가에게 밀어붙이는 건 아닐까?
그것은 전문가로서 살다가 그 직업을 손을 놓고 다른 일들을 자꾸만 하다 보면
정작 내 본업이었던 작가나 화가로써의 자세나 의식 또는 직업적 전문성이 너무 떨어지고,
그러다 보면 삼류가 되어 있을까 봐 걱정 아닌 걱정을 하는지도 모른다.
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내가 젊었을 때, 또는 한 때 무엇 있다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