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꽃 필무렵

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서 참 궁금하구나.

by 권길주

스물 넷의 나는 어느날 교회에서 청년부와 대학부가 함께 가는 정신병원에

찬양 봉사를 다녔다.

나는 그 당시 처음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들을 보게 되었다.


그때 당시는 몇십년 전이라서 그랬는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중에는 심한 환자는

쇠사슬 같은 고리가 팔목에 손이 감겨져 있는 환자도 있어서 나는 굉장한 충격을 받게 되었고,

예배가 드리려지고 찬양을 부를때는 속으로 덜덜덜 떨리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보통의 환자들은 목에 십자가도 두르고 있고, 아무때나 웃거나 이상한 소리를 지르는

경우도 있어서 우리는 그들에게 참으로 조심스럽게 대하고 친절하게 대하려고 애를 쓰는 것 부터

배우면서 그 예배는 이루어졌다.

그때 나는 내 인생에서 오랫동안 함께 하게 될 약사님을 한 분 알게 되었다.

그분은 바로 그 병원에 약국장으로 계시던 약사님이였고, 그 당시 나와 한 교회에 다니시는

집사님이셨다.


그리고 그 병원은 그 분의 가족들이 운영하는 큰 정신병원이였는데,

우리가 그 병원에서 매주 토요일 찬양 예배를 드리며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들을

섬길때 어느 날 병원은 어떤 위기가 왔고 우리는 더 이상 그 병원을 가질 못하게 되어서

우리의 찬양 예배도 끝이 났었다.


그리고 나는 가끔씩 교회에서만 그 약사님을 뵙게 되었는데,

어느 날 그 약사님 옆에 너무 예쁜 여학생이 서 있었는데, 약사님이 인사를 시켜서 둘이는

반가이 인사를 했다.

다름 아닌 약사님의 딸이였는데, 대학 1학년 여대생이였고, 그 여학생은 정말 미인중에 미인이였다.


나도 여자지만 약간 질투가 날 만큼 예쁜 여학생이 그날부터 내 친한 동생이 되었고,

그 애는 유난히 나를 따르고 우리는 몇 년을 거의 한솥밥 먹다 시피했다.


의상디자인을 전공한 그 애는 그 뛰어난 미모때문에 매일이 에피소드같이 재미도 있고,

치근대는 남학생들 때문에 힘들게도 학교를 다녔었다.

어느날 약사님 가족은 병원에서 쫒겨나다시피 한 일이 있었고, 그 약사님은 내가 살고 있던

천안의 어느 동에서 약국을 차리시게 되었는데, 나는 친구와 동네를 산책하다가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약국이 새로 개업을 했는데, 그 안에서 약사님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부르시는게

아닌가.


나는 그 날부터 그 약국에 알바생이 되었고, 그 집에 딸인 그 미모의 여대생과는 매일 만나서 한 솥밥을 먹는

사이이기도 하고 그림을 잘 그리고 피아노를 잘 치는 그 동생 집은 나의 놀이터이기도 하고 쉼터 이기도 했다.


나는 약국에서 알바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내가 원하는 공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심한 갈등에 쌓여서 가족들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약사님은 내게 자꾸만 네가 약국에 손님들과 환자를 잘 다룬다고 약대 편입을 자꾸만 권하셨다.


그러나 내 머리로는 수학이 도무지 문제였기에 수포자인 내가 약대 편입은 아무리 가고 싶어도

불가능해 보이는 산이였기에 나는 그 길은 포기했다.

그리고 나와 그 동생은 매일 같이 그림 그리는 화가 언니네 카페를 가서 (그 당시도 화가 언니가 커피숍을 했었음) 수다도 떨고 한국화도 배우고 그렇게 세월을 보낸 적이 있었다.


나는 얼마나 그 집에 식구들과 친하게도 지내기도 했지만, 그 가족사에 많은 관여가 되었기도 해서

우리는 거의 한가족처럼 지냈었는데,

어느날 약사님은 천안에서 경주로까지 이사를 가시게 되었다.


그리고 그 딸만 천안에 남아서 학교를 다니며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이유는 여기서 다 말할 수 없지만, 그 당시 그 동생이 당한 여러가지 고충은 나로써도 옆에서

해결해 줄 수가 없는 문제들이였고,

결국 동생는 간신히 대학 졸업장을 쥐고 경주로 내려가버렸다.


그리고 나는 내 여동생과 함께 한번 경주에 간 적이 있었고, 또 얼마 후에 혼자 가서 그 집에서 열흘이상 머물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동생과는 경주의 안압지를 매일 가기도 하고, 천마총을 가기도 했다.

보문호수에 가서 밤에 달그림자도 보고, 첨성대에서 별을 보겠다며 밤에 돌아다니기도 했던 적도 있었고,

포항에 바다를 가서 파도를 보기도 했다.

그때 그 아이도 청춘이 너무 아팠고, 나도 나의 청춘이 너무 아팠기에 우리는 밤을 새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말을 하다가 눈물을 흘린적도 많았다.


약사님은 자꾸만 내게 경주에서 자기랑 약국을 같이 하자고 천안에 가지 말라고 하셨고,

나는 가족들이 있는 천안을 떠날 수 없는 처지라서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그 동생은 의사와 결혼을 하고 십여년 이상을 잘 살았다.

약사님과 그 동생는 나에게 방송일 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언니가 정말 잘 됐으면 좋겠다고

늘 응원하고 지지해줬다.


그러다가 어찌하여 우리는 인연이 멀어지다가 십년 정도를 만나지 못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 동생을 찾아 지방의 소도시로 갔다.

그리고 우리는 이틀을 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 동생은 내게 명품백을 몇개나 내 배낭에

넣어주었다.

나는 지금이나 그때나 명품백에는 별 관심이 없는지라 달라는 교인들에게 하나씩 나눠주고 나니

나중에는 내 손에는 하나도 없을 지경이였다.


그 뒤로 다시 나는 나의 일상에서 너무 바빴고, 자주 통화를 못하다가 또 어느 사이 연락이 끊어져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 동생에게서 울먹이는 소리의 전화가 왔다.

나를 찾게 된 이유는 자기가 대장암 3기 진단을 받고 급하게 수술을 했다고

언니..... 나 죽으면 어떻게 하며 기도해 달라는 것이였다.


그후로 나와 그 동생은 다시 자주 통화를 하다가 그 동생이 자기는 다 암이 다 낳은 것 같다고

신나게 골프를 치러다닌다며 어느 날 부터는 전화가 잘 오질 않았다.

나 역시도 내 삶의 바쁜 일정속에서 서서히 그 동생 생각이 다급하질 않게 되었는데,

한 일년 정도가 지나서 다시 전화를 해보니 그 동생이 전화는 더 이상 되질 않았다.


전화번호가 바뀐걸까 해서 그 동생의 남편이 있는 병원에 전화를 해볼까 하다

미루고 미루다 보니 벌써 한 오년이 넘어버렸다.

암을 이기고 살았는지, 아니면 혹시라도 재발해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런지

가끔씩 너무 궁금하기만 한데,

그 동생이 살아가는 삶에도 너무 가까이 하는 것이 실례는 아닐지 싶기도 해서

생각 날 때만 기도를 해주고 살아간다.

그래도 그 뛰어난 미모의 의사부인이 사십이 조금 넘어 암에 걸린 것에 나도 충격을 받았고,

의술이 좋으니 살아난 후로 잘 관리 해서 아직도 골프치면서 신나게 살고 있으려니 하지만

가끔은 그 동생이 참 보고싶을 때가 있다.


위트와 재치가 뛰어나고 문학적 소양이 너무 풍부해서 나보다 문학적인 지식은 더 많았던

그 뛰어난 미모의 동생이 아직도 산이 무척이나 깊고 높은 어느 소도시에

잘 살고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지금쯤은 오십초의 나이가 되었으니 남들에게 너그러이 베풀고 지역에 영향을 끼치는

좋은 사람이 되어있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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