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란지교를 다시 꿈꾸며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by 권길주

여고시절 우리의 교정에는 라일락꽃이 유난히 많이 피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친구야

너는 그 라일락꽃을 따서 씹으면 쓰고 맛이 없었다는 것도 기억하는구나.


보라색 라일락꽃, 하얀 라일락꽃이 우리들 열일곱의 하얀 교복 칼라보다 화려해서 누구든 그 꽃옆에

서있기만 해도 우린 다 예쁘게 보였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던 시절이었지.

교정의 플라타너스 나무에 기대어 너의 첫사랑과 나의 두근거림을 소곤대며 누구라도 들을까 나뭇잎

바스락대는 소리에도 놀라던 우리는 꿈 많던 여고생이었지.


때때로 학교 앞 튀김집에서 핫도그를 사 먹으며 세상에서 제일 잘 사는 딸도 부럽지 않아서 마냥 늦장을

부리며 기차역으로 향하다가 기차가 역에 도착한 걸 알고는 교복치마가 휘날리도록 달려가 겨우 기차를 타면

삼등열차 보다 못한 완행열차에서는 아침에 싸간 도시락에서 흘러내린 김칫국물이 쏟아진 가방에서 종일 풍기던 김치냄새와 광천장수 아주머니들이 머리에 이고 온 새우젓과 조기등 생선 냄새가 풀풀 나는 커다란 스텐 다라와 고무함지가 그리고 너네 엄마, 우리 엄마 할 것 없이 이 동네 저 동네에서 가난한 엄마들이 머리에 이고 나온 장보따리에는 장에서 이것저것 사서 담은 무거운 보따리들이 이 발에 차이고 저 발에 차이고 있었지.


그런 우리는 지금 서로 무엇을 찾으며 누구를 찾으며 살아가고 있는 거니.

간이역을 달리던 기차도 다 사라지고, 우리는 이제 너무 나이가 먹었구나.

그래도 친구야 우리는 인간의 속사정을 사람에게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을 너에게 터 놓고 나면 그리도 편하고 네 마음도 내게 터 놓으면 네 마음도 한없이 편해서

며칠을 잠 못 자고 이리 뒤채고 저리 뒤채던 인간사 고민도 밤새도록 핸드폰이라도 붙잡고 얘길 하다 보면

어느 사이 그 세상사 고민이 다 사라져서 새털처럼 가벼워진 마음으로 잠을 청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신 엄마, 암 병동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고 이혼의 아픔. 자식의 죽음까지

어느 누군들 이 세상에서 그렇게 가슴 아프게 인생을 살아가나 싶은데

친구야 네가 참을 수 없는 눈물을 삼키며 목이 잠기도록 한 마디를 겨우 하면 나는 그래도 네가 살아 있으니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가 싶을 때가 많다.


그래도 널 만나면 나는 제대로 한번 안아주지도 못하는 철부지 친구.

결혼을 안 해봤으니 이혼의 아픔을 알겠니.

자식을 낳아보지 않았으니 자식 잃은 어미의 고통을 알겠니.

아직은 부모를 잃어보지 않았으니 그 슬픔을 알겠니.


나는 철없는 친구일 뿐이지.

그래서 내가 지금 부모님 병시중 드는 거 힘들다고 너보고 가끔씩 투정을 부리면 너는 절대 너는 부모님을

떠나면 안 된다고 무조건 그 집에서 살면서 글 쓰고 돈도 벌라고 야단이지.


너는 감수성도 많아서 늘 내게 글 쓸 거리도 네 입에서 술술 나오고 여행도 무지 좋아하는 친구지.

그런 네가 자주 말하는 글은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글이지.


서울에서 우리는 각자 몇십 년을 살았지만, 우리가 서울에서 사귄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구나.

그때는 돈을 버느라고 만났고, 그때는 젊음을 즐기며 만났고, 그때는 내 진정한 고통은 감추어야 남에게

약점이 잡히지 않는 만남이 더 많았던 곳이었지.


그런데 점점 늙어가며 얼굴에 주름도 생기고 머리는 희어지는데, 우리는 이제 고향에 땅을 밟고 있으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걸 보면 너도 나도 이제 세상의 힘이 빠진 중년의 여인들인가 보구나.

외롭다는 생각이 들어서 차가운 눈길을 혼자 걸으며 산책이라도 하려면 벌써 머리에 모자를 둘러써야 하고

두꺼운 파커를 입어야 하는 나이가 되었구나.

그래도 네가 다다음주에는 대천바다에라도 가자고 한 해가 가는 끝 무렵에 이렇게 새해 약속을 잡아주니

고맙고 고마울 뿐이지.


질퍽거리는 길바닥에 물을 피하며 성탄절 예배를 드리러 간 기억이 나냐고 물어본 친구야,

그래 아직도 가로등 하나 제대로 없는 이 시골길이 무서워서 해가 지면 꼼짝 못 하고 살아가는 날들이

도시체질로 바뀐 나에게는 밤이면 감옥처럼 느껴져도 고요한 밤의 적요를 느끼며 글을 쓸 수 있는 것으로

위안도 삼는다는 거 알고 있지 나의 친구야.

그랜, 네 말대로 이제는 바구니 달린 자전거를 하나 사서 도고온천 카페도 가고 아산에 교회에도 가고

그렇게 살아야 하나 봐.


우리 집 과수원 밭에 사과나무는 십 년 전쯤 뿌리까지 다 캐서 없어졌는데,

과수원 밭 옆에 어릴 적에 우리들이 다녔던 교회에는

아직도 십자가 불이 하루도 꺼진 적이 없이 날마다 켜져 있구나.

우리가 저 십자가 아래에서 소녀시절 꿈을 꾸며 기도를 했겠지.

이웃을 사랑하면며 살게 해달라고.

부모를 공경하며 살게 해달라고.

그리고 친구를 사랑하게 해달라고.


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살게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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