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공감

나를 치유하는 필사 시간.

채근담을 필사하고 있습니다.

by 소이

어릴 때 교회에서 모든 교인들이 구절을 나누어 정해진 만큼 필사를 하고 필사본 성경 한 권을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생쯤 되었었는지 기억이 흐릿하지만 지금은 교회를 다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작년 11월. 새해를 두 달 남겨놓고 그간 바빴던 한 해를 정리하며 마음을 돌보고 싶었다. 필사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두 달간 남는 노트도 소진할 겸 채근담을 필사하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처음 시작은 두 달 동안 마음 돌보기라는 나름 시간이 정해진 일이었는데, 이토록 빠지게 될 줄이야.


내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이 때로는 부담이고 거부감이 들어서 베껴 쓰는 필사가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쓰고 싶은 구절을 한 자 한 자 마음을 다해 집중해서 쓰다 보면 명상에 가까운 경험을 하게 된다. 때로는 명상하려고 눈감으면 온갖 생각이 나는 것처럼 쓰면서도 쉴 새 없이 다른 생각들이 드나들기도 하지만 쓰다 보면 몰랐던 내 마음을 알아차리기도 하고, 모든 생각을 밀어내기도 하고, 정화되기도 해서 필사 시간이 좋다.








아침에 가족들을 배불리 먹여서 보내고 나면 한차례 정리가 이어진다.

어질러진 곳곳을 정리하고 한참 환기를 시키고 나면 모든 창문을 닫는다.

이렇게 소음을 차단하고 나면 커피포트에 물 끓는 소리도 더 잘 들리고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진다는 느낌도 더 크게 와닿아 여유를 느끼게 된다.


새벽 시간이 주어지는 날에는 눈 뜨자마자 어두움이 내려앉은 책상에 불을 켜 두고 커피포트 물 끓는 소리를 듣는다. 어쩌면 이런 환경을 만듦으로써 작은 것들에 감사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요함 속에서 나를 위한 사소함을 준비하고 온전히 누리며 감사를 찾는다.


새벽이 주어지면 새벽이 주어지는 대로,

아침이 주어지면 아침이 주어지는 대로,

때로는 잠들기 전이라도.








거친 느낌이 적당히 드는 것이 좋아서 미끄러지듯 써지는 펜들을 다 놔두고 서걱서걱 모나미 볼펜을 꺼낸다.

적당히 거칠어서 쓰는데 더 집중하게 되고, 쓰다 보면 잉크가 묻어 나와 휴지에 닦으며 숨을 고르게 된다.

어딘지 모르게 모자란듯한 나와, 약간은 불편한 점들이 있는 모나미 펜이 함께 움직이는 게 어쩐지 완벽하지 않아서 마음에 든다.


다른 때보다 더 마음에 드는 구절을 만나면 한 구절 쓰고 한참을 머문다.

음미하고, 내 마음을 비춰보며 다시 읽기를 반복한다.


번잡한 마음을 모으지 못하면 결국 손이 제멋대로 움직여 수정펜을 들게 되고, 행간에도 여유가 없다.

어쩔 때는 날짜 쓰는 것부터 실수다. 오늘처럼.

그럼 내 마음이 오늘 어떤 상태인지 알게 된다. 내가 쓴 필사 노트를 보며 내 마음의 알아차림이 시작된다.

어떤 글자에는 떨림이 느껴지고, 어떤 글자에는 의기소침이 느껴지고, 어떤 글자는 설렘이 느껴진다.



한 자 한 자 정신을 집중하고 글귀를 음미하며 적는 시간은 30분.

길지도 짧지도 않은 30분을 보내고 나면 불안은 가라앉고, 헛헛한 마음은 채워지며 오늘을 더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용기도 얻게 된다.


써놓고 보니 만병 통치약쯤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마음이 자라는 약이다.

먹어보고 좋으니 많은 분들이 드셨으면 좋겠다.

오로지 내 손으로 지어내는 치유의 약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이가 들면 생기는 무서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