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습기 제거

by 소이

예전에는 여름을 좋아했다. 어릴 때는 생일이 여름이라 좋았고, 크면서는 친구들과 가는 여름휴가가 기다려져서 좋았고, 작은 어른이 되었을 때는 꽃무늬 프린트가 있는 원피스나 짧은 스커트를 입을 수 있어서 좋았다. 여름은 모든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계절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30대 후반이 되면서 여름이 좋은 이유는 몇 가지로 줄어들었다. 더 이상 꽃무늬 원피스에는 손이 가지 않았고, 짧은 스커트 역시 마찬가지었다. 친구들과의 여름휴가도 어느 순간 부부 동반이 되기 시작하면서 꾸밈없는 풋풋함 대신 건강한 모임으로 바뀌었다. 더 이상 우리들이 어리숙하지 않다는 게 가끔 아쉽다.


언제부터인지 가을이 되기 시작하면 심하게 정전기가 나곤 했는데 차 문을 열고 닫을 때,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누를 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때면 매일같이 짧은 긴장을 하곤 한다. 겨울이 되어가면 더 심해지는데 머리카락이 쭈뼛서는 스파크 때문에 더 이상 좋아하는 니트 원피스를 입지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될 정도다. 안 해도 되던 고민거리가 생기면서 여름이 좋은 이유 중 하나가 '정전기 나지 않는 것'이 되었다.


몸에서 수분이 줄어들수록 건조함이 몰고 오는 정전기와 주름만 짙어지는 것 같아서 씁쓸하기도 하지만 마음에 습기가 날아가는 듯한 기분은 감사한 일이다. 어제의 축축한 기분이 조금씩 보송해지는 것 같은 기분, 내일이면 마음에 남은 물기가 조금 더 마를 것 같은 희망이 생기는 건 좋다.


싱그러웠던 20대에는 눅눅한 기분이 들면 편의점에서 맥주를 한 캔 원샷한다거나, 친구가 킵 해놓은 데낄라를 한잔 마시고 간다던가, 차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불렀던 것 같은데 이 방법들이 생각보다 순간의 효과만 발휘한 다는 걸 조금 더 나이를 먹게 되면서 깨달은 것 같다.


눈꼬리가 올라가고 미간이 좁아지고 마음이 간장 종지만 해지는 기분이 들면 어제 몇 시간을 잤었는지 떠올려본다. 수면 시간이 여유 있는 사람이 되느냐 마느냐를 가르는 꽤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 후부터는 쓸데없는 말을 자꾸 하게 된다 싶을 때는 잠을 잔다.


감정의 휠을 컨트롤하는 게 벅차다고 느껴지거나 묵은 감정이 남아 자꾸만 세상에 쪼잔함 감정이 밀려들고 억울할 때는 친구를 찾아 퇴근 후 밤마다 세 시간씩 카페에서 속풀이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가끔은 그 방법이 쓸만할 때도 있지만 이제는 그보다 글을 쓰며 놓쳐버린 감정의 휠을 컨트롤하려고 한다.


맛있는 걸 먹고, 술을 마셔서 해결하는 대신.

누군가를 붙들어두고 몇 시간씩 하소연하는 대신.


잠을 자고, 글을 쓰는 사람이 된 것이 좋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말로는 쉬운 '실패'를 쌓으라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