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고 내가 생각하는 '옳은'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나름의 고심을 한다. 때로는 그 방향이 친구나 가족에게 지지를 받는 방향이기도 하고,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 것 같은 기분에 후회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려운 결정을 앞두고는 나 혼자 결정하지 못해 여기저기 조언을 구하는 상황이 생기는 거 아닐까?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거나 명확하게 따져봐야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겠다고 판단되면 타인의 조언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시선이 내면을 향해야 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정답을 찾으려는 듯 타인에게 묻곤 한다.
내가 만족할 만한 상황, 내가 잘 통제할 수 있는 환경설정, '적당히', '조금 빨리' 같이 애매하게 표현된 약속 같은 것들이 결정을 어렵게 만들기도 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셰익스피어, 니체, 루소 등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준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많은 자기 자신답게 사는 법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신이 내면에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위의 시금석이 될 내면의 기준을 세워, 이에 따라 때로는 자신을 칭찬하고 때로는 비난해야 한다. 나는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나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위해 나만의 법규와 법원을 두고 그곳에 나 자신을 제소한다. 다른 이들의 기준으로 내 행위를 제한하면서도 나의 기준으로 내 행위들을 펼친다.
<몽테뉴의 수상록> 중에서.
아주 사소한 일상 변두리의 일부터 삶의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일까지 수많은 결정 앞에서 어떤 기준이 옳은 것일까? 그 결정은 누구의 행복을 위한 것일까? 어느 한쪽은 A의 방향이 옳다고 이야기하고, 어느 한쪽은 B의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나의 양팔을 잡아당길 때 얼마나 깊이 나의 행복, 나의 내면을 바라보았느냐에 따라 조금은 후회가 덜 한 방향으로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옳음의 기준이 타인에게 있을 때, 다음, 그다음의 결정도 타인의 기준에 맞춰야 할지 모른다. 모든 사람이 다른 기준을 가질 수 있다는 차별성을 기본 값으로 둘 때 내가 세운 행복의 기준도 옮음이 될 수 있다. 행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시선을 내면으로 고정시키고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옮음의 기준을 세웠으면 하고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