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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열 Sep 30. 2023

그때 그 시절 17(연재)

17편 득실이(1)

우리가 태어난 5~60년대는 가난했지만, 행복한 세대였다. 아니, 정확히 그렇게 사는 게 행복한 줄 알았다. 전쟁이 끝난 고요하고 평온한 농촌이었다. 그때 태어난 세대를 ‘베이비 부머’라 부른다. 가족은 대가족이었다. 대부분 농촌에서 살았고 한 집 건너면 모두 그만그만한 형, 동생들이다. 한 마을이 정이 넘치는 이웃사촌처럼 지냈다. 반면, 부모님들이 태어나고 자랐던 3~40년대는 우리보다 더 어려웠고 처참한 때였다. 일제강점기를 사셨고 6.25 전쟁이라는 뼈아픈 역사를 직접 경험하셨던 분들이다.


지금이야 풍족한 60세가 되어 그때 그 시절을 추억으로 글을 쓰고 있지만, 사실은 비참한 어린 시절이었다. 전쟁의 흔적은 없어지고 이제 70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동족끼리 총을 겨누고 있다. 전쟁의 영향은 100년이 갈지 모른다. 식민과 전쟁은 다시는 재발하지 말아야 할 역사다. 전쟁 후 이산가족이 되거나 정상이 아닌 가정도 많았다. 마을에는 장애인도 많았다.


북으로 미처 도망 못 간 빨치산이 지리산에만 있던 것으로 알았는데 변산에도 있었다. 친구 상식이 집안은 빨치산한테 당했는지 친일 경찰한테 당했는지 정확한 증거는 없지만, 그때 한 가정이 흩어졌다. 상식이 할아버지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큰딸은 상식이 엄니고 둘째 딸이 이모였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상식이 엄니는 그 충격으로 약간 정신 장애가 있었다.


상식이 엄니는 집을 나가면 몇 달에 한 번씩 들렸다. 물론 아버지도 누구인지 모른다. 다만 양반 가문인 윤 씨라고만 알고 있다. 이모도 슬하에 남매가 있었으나 이모부는 아들만 데리고 서울로 떠나 버렸다. 들리는 소문은 서울에서 잘 산다고 하는데 한 번도 마을에는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렇게 이모는 친딸과 언니 자식인 조카 상식이를 키웠다.


다행히 이모는 대항리에 선친이 남겨 놓은 땅이 좀 있었다. 이모는 마을에서도 여자 혼자 살기 위해서 생활력이 강하고 악독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여자들은 물론 남자들도 꼼짝 못 했다. 별명도 독수리 종류인 호리개(솔개)였다. 발톱이 날카로워 닭도 잡을 정도 사나운 새다. 항상 경계하는 과부였다. 이모 집은 우리 집에서 개울 건너에 있는 아담한 초가집이었다. 상식이가 기거하는 방은 외양간을 개조한 창고로 쓰고 있는 방이었다. 거기에서 고아가 아닌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초등 입학 전 쌍식이와 쌍순이랑 개울에서 소꿉장난하고 놀았던 생각이 어렴풋이 난다. 상식이 엄니를 쌍둥이 엄니라 불렀는데 이유가 있었다. 원래는 이란성 남녀 쌍둥이를 낳아 이모 집에 맡겨 키웠다. 이란성 남녀 쌍둥이는 둘 중에 한 사람은 죽는다는 미신이 있었다. 당시는 농경 사회라 남아 선호 사상이 남아있었다. 아들 많은 엄니는 위풍당당하고 딸 많은 엄니는 주눅 들어 사는 세상이었다. 딸만 낳으면 소박을 당하기도 한다.


초등학교 입학할 즈음 쌍순이가 없어졌다. 소꿉장난하던 여자 친구가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에 어린 마음에 보고 싶어 울었던 생각이 난다. 멀리 갔다고 하는데 하늘로 갔는지 땅으로 갔는지 사람들은 크게 관심도 없었다. 동네 애들이 북적거렸고 홍역이나 전염병이 있어 유아 사망은 흔한 일이었다. 이모님은 쌍둥이 둘을 키우기는 너무 벅찼는지도 몰랐다. 홀로 된 쌍식이는 이제 쌍둥이가 아닌 이름도 윤상식이라 불렀다. 어려운 환경에도 다행히 이모님은 초등학교를 보냈다. 농사지을 똑똑한 사내가 필요했던 거였다. 부모가 없어 홀로서기 훈련을 혹독하게 시켰다. 상식이는 농사일을 도우면서 똑똑하고 튼튼하게 자랐다. 욕심도 많고 부지런해 함께 나무를 하러 가면 내 두 배를 해서 나한테 반은 덜어 줬다. 학교 갈 때 올 때는 기다렸다가 5km나 되는 학교길을 함께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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