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mplicity
옷장은 터질 거 같은데,
아침마다 입을 게 없었다.
출근 전 거울 앞에서 질질 끌다가,
아슬아슬하게 사무실로 슬라이딩하고는 했다.
출근룩 연구
모닝 스트레스가 너무 싫었다.
그래서 출근룩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건 남자들의 스타일링이었다.
셔츠 + 바지. 끝.
스커트를 안 입으니 스타킹과 구두도 필요 없었다.
로퍼나 스니커즈.
훨씬 자유롭고, 편하면서도 사무실에서 적당히 갖춰 입은 인상을 주는 노동복이 완성.
너무 드레시한 옷이나 여성여성한 옷은 출근룩으로는 제외했다.
샤넬이 남자 옷에서 영감을 얻어 여성을 코르셋에서 해방시켰듯이 나도 남성복에서 힌트를 얻어 스스로 높은 구두에서 해방되었다.
자연스럽게 화이트 셔츠와 치노팬츠, 로퍼가 내 시그니처 룩이 됐다. 여기에 시계와 벨트, 양말컬러로 변주를 준다. 나의 스트릿 감성을 주로 양말컬러로 표현한다. 시계는 페이스가 큰 남성 시계를 선택한다.
여름에는 롱스커트도 자주 입는다.
셔츠랑 매치하면 덜 여성스럽고, 일하기에도 편하다.
스커트는 무릎 언저리에서 애매하게 끊기는 것보다, 발목까지 툭 떨어지는 게 좋다. 원피스도 셔츠타입으로. 여기에 스니커즈나 발 편한 메리제인 슈즈와 매치하면 좋다.
나에게 매일 유니폼처럼 똑같은 옷을 입으라고 하면 정신적으로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매일 기분도 다르고, 아침 바이오리듬도 다른데?
아침에 는 뜨면 그날 먹고 싶은 메뉴가 떠오르듯이 나는 입고 싶은 컬러가 떠오른다. 양말로라도 그 컬러를 신어야 하루가 편안하다.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고, 편안하게 마무리하기 위해서 나에게 맞는 좋은 옷은 꼭 필요한 에센스.
윤여정 배우가 화이트 실크 셔츠에 모직 바지에 로퍼를 신은 스타일을 보고 역시 클래식은 세대를 가리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 여기에 시계가 목걸이 스타일만 머지다. 진주목걸이를 할 수도 있고 가는 실버 목걸이를 할 수도 있다. 여성용 벨트는 좀 더 클래식할 거고 남성용처럼 볼드한 벨트라면 약간 스트릿 한 감성을 줄 수도 있다.
향수
중성적인 느낌, 허브향, 플로럴 계열을 레이어링 하는 걸 좋아한다. 향은 음악처럼 기분을 순식간에 바꿔버린다. 출근길에 긴장이 풀리기도 하고, 하루의 리듬이 달라지기도 한다.
허브향 중에서는 바질향을 특히 좋아하고 플로럴 계열의 향을 레이어링 하는 것도 좋아한다.
향에는 돈을 좀 쓰는 편.
향기로운 사람, 향기로운 인생을 추구하니까.
로망의 옷장
30년 차 출근러로서 옷장에 대한 로망은 딱 하나.
아침에 눈 감고 손만 뻗어서 집어든 옷을 입어도 하루 스타일링이 완성 1초 컷.
사실 그게 어렵지도 않았다.
상의는 계절 따라 가디건, 재킷, 트렌치, 야상, 패딩, 코트. 하의는 그레이, 블랙, 화이트, 베이지, 카키. 소재만 계절에 맞춰 바꾸면 된다.
신발은 블랙 로퍼, 화이트 스니커즈.
겨울엔 앵클부츠 정도.
가방은 여름엔 린넨백과 프라다 백팩.
겨울엔 가죽소재의 샤넬과 프라다 메신저백
계절별로 두세 개면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너무 무겁지 않은 것이면 된다.
불편을 감수하고 추구하는 스타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 몸이 불편하면 자세가 흐트러진다. 스타일이고 뭐고 짜증만 난다. 가장 럭셔리한 것은 가장 편안한 것이다.
액세서리와 메이크업 도구는 사무실 서랍에 둔다.
아침 시간이 아무리 타이트해도 기본은 세팅할 수 있도록.
특별한 날로 만들면 되죠
회사에 나보다 더 출근룩에 진심인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는 매일 셔츠를 말끔하게 입었다. 사실 셔츠는 속옷으로 매일 바꿔 입는 게 맞다. 그런데 그 정성과 부지런함이 신기해서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매일 바꿔 입어요?
아주 특별한 날도 아닌데?
매일 특별한 남로 만들면 되죠.
한참 동안 큰 북소리의 여운이 남았다.
내가 이 세상에서 남자사람에게 들어 본 말 중에서 가장 멋진 답변으로 기억한다.
퇴직 후에는 옷장의 옷을 훨씬 줄이고 계절별로 정말 좋아하는 옷만 한적하게 툭툭 걸어 놓고 싶다. 분더샵같은 편집샵처럼.
매일 출근하는 일이 없으니, 스타일도 바뀌겠지.
더 스트릿 한 감성?
클래식한 무드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링 책 중에 <여자의 옷장은 인생을 닮았다>라는 책이 있다. 내 인생을 닮은 옷장은 앞으로 어떻게 업그레이드될지 두근두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