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리스트
내 찜리스트는 대부분
‘마지막’이라는 말을 달고 있다.
그래서 금액은 크고,
결제까지 걸리는 시간은 길다.
나는 충동적으로 물건을 담지 않는다.
대신 오래 바라본다.
다른 대안을 찾아보고,
그래도 남아 있으면
그때서야 찜리스트에 남긴다.
1. 에르메스 집시
— 내 인생 마지막 가방
이 가방을 처음 봤을 때
설렘보다 먼저 들었던 생각은
“이걸로 끝나도 되겠다”였다.
더 가볍지도,
더 유행도 아니지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형태.
이 가방을 들고
어디에 가야 할 것 같지도 않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지도 않다.
파리에서,
어떤 할머니가 캐시미어 코트에
가죽이 나달 나달 해진 에르백을 들고
걸어가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장면이
십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선명하다.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
이 가방이 꼭 필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2. 마르티넬리 루체 조명
— 역시 마지막 조명
이 조명은
빛을 밝히는 물건이라기보다
어디를 볼지를 정해 주는 물건에 가깝다.
대안을 많이 찾아봤다.
조금 낮은 가격대의 조명도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남는 건 늘 이거였다.
형태, 빛, 태도까지
하나의 구조로 정리된 조명.
대체 불가능한 존재감을 가진 조명을
디자인한
그 능력 자체에
나는 오래 감탄하고 있다.
3. 막스마라 마담 아이코닉 코트
— 네이비로 인생 코트 마감
옷장을 정리할수록
코트는 줄고,
기준은 또렷해진다.
이 코트는
더 따뜻해 보이기 위한 것도,
더 멋있어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결론 같은 옷.
네이비로 고른 이유도 같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색,
어디에도 끼워 맞출 필요 없는 선택.
4. 피아제 터콰이즈 블루 시계
시간을 과시하는 물건에는
이제 흥미가 없다.
이 시계가 남아 있는 이유는
색 때문이다.
정확히는
시간을 다루는 태도처럼 느껴지는 색.
급하지 않고,
조용하지만 분명한 톤.
시간을 쫓기보다
시간 위에 올라서는 느낌이 있다.
그냥,
내 거다.
이건
갖고 싶은 물건의 목록이 아니라,
이미 내 욕망이
어느 정도 정리된 상태인지를
보여주는 리스트.
그 말을 듣고 보니
공통점이 분명해졌다.
• 모두 ‘마지막’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고
• 유행이나 과시와는 거리가 있으며
• 지금 당장 사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다는 점
체념도, 자조도 아니었다.
욕망이 줄어들어서가 아니라
욕망이 정확해졌다는 확인이었다.
나는 지금
이 물건들을 사지 않아도 괜찮다.
설레면서 기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욕망은
바로 채울 때보다
기다릴 때
나를 더 잘 설명한다.
27년이 되면
이 중 몇 개는
정말 내 곁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어도 괜찮다.
이미 이 찜리스트는
내가 어떤 상태로 살고 싶은지를
충분히 말해주고 있으니까.
지금은,
설레면서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