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퇴준생의 마음

D-1642일

by Mira

회사생활을 돌아보게 되고, 정년 이후의 삶을 상상하고 준비하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즐기는 오늘은 어떤 하루일까?


나도 믿기 힘들지만, ‘출근’을 즐긴다.

매일 아침 눈을 떠서 갈 곳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좋다. 이거 할까, 저거 할까 망설이댜가 그냥 흘러 보내는 주말을 보내고 나면 특히.


사무실 책상에 앉아 하루를 보내는 일.

어릴 적엔 갑갑하고 벗어나고 싶었던 공간이,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장소가 되었다.

가장 집중이 잘 되는 곳.


회사는 2년마다 최신 컴퓨터를 교체해 주고,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다.

화장실은 전문가의 관리로 내 침실보다 더 깨끗하고,

로비엔 990원짜리 커피, 1,500원짜리 아이스크림이 기다리고 있다. 주간 점심 식단은 영양까지 고려한 5,000원 메뉴. 맛도 있다.


회사의 문화도 많이 달라졌다.

칼퇴가 디폴트고, 회식은 선택.

주말 회의? 노노.

주말과 이어서 휴가 쓰라고 장려하고,

평가에 예민할 필요도 없다.

이제는 후배들보다 좋은 점수를 받고 싶은 마음도 없다. 디자인 퀄리티와 비용이 주요 챌린지지만, 그건 이제 눈 감고도 한다.


출근은 9시, 내 컨디션대로 리듬을 조절한다.

피트니스에서 스트레칭하고 샤워 후 사무실에 오르는 루틴.

이 생활의 진짜 장점?

집 화장실을 건식처럼 쓸 수 있다는 것.

수건 빨래 줄고, 청소할 일이 준다.


점심시간엔 앱으로 메뉴를 고르고, 동료들과 나눠 먹고, 회사 옆 공원에서 햇살 받으며 산책도 한다.

그늘 따라 걷는 여유도 있다.


일 없어도 야근하고, 주말 호출받던 시대를 살았던 나에겐 이런 변화들이 레볼루션, 그 자체.


휴가 한 번 내려면 눈치 보던 시절도 있었다.

이젠 시스템에 신청만 하면 끝.

이유도 묻지 않는다.


월요병?

회사원의 불치병이라 여겼지만, 20년 차가 지나니 일요일 오후면 슬그머니 출근이 기다려진다.

히키코모리 DNA는 다 어디 갔을까?


이런 루틴들은 퇴사와 함께 어떻게 변할까?

가장 아쉬울 것 같은 건,

아침에 ‘그냥 나갈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

카페에서 일하는 것도 하루 이틀.

집에서는 집중이 잘 안 된다.

작업실처럼 쓸 수 있는 작은 공간이 필요할까?

홈오피스를 마련하고, 매일 그 방으로 출근할까?


나에겐 **‘책상에 앉는 시간’**이 중요하다.

어떻게든 앉아 있으면, 뭔가 하게 된다.

글이든 그림이든, 그날 마음을 채우는 결과물 하나가 생기면 하루가 충만하다.

역시 인생은 엉덩이로 하는 거다.

책상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점심시간.

주말에 혼자 있으면 문득 깨닫는다.

누군가와 점심을 나누는 하루가 소중한 일상이었구나.

회사에선 설명 안 해도 되는,

눈빛만으로 웃게 되는 대화들이 있다.

그런 동료들이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나는 지금,

정년과 함께 사라질 것들을 조용히 관조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미래를 준비하면서도,

오늘을 오롯이 ‘준비’만 하며 보내고 싶지는 않다.


한때 회사는 나의 굴레고,

감옥이고,

족쇄였다.

어떻게든 외근을 나가고 싶었고,

탈출만이 살길처럼 느껴졌다.


그런 내가, 이제는 사무실이 좋아지기 시작했는데…

떠날 시간이 다가온다.


후배들은 말한다.

“아직 4년이나 남았는데 너무 일찍부터 생각하시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나는 안다.

그 4년이 얼마나 순식간에 지나갈지.

몸이, 마음이, 이미 안다.

시간은 이제 5년, 10년 단위로

고속열차처럼 휙휙 지나간다.


인생이란,

결국 다 사라질 것들을 애써 쌓아 올리는 일.


그러니까,

더 소중하다.

오늘을, 이렇게 소중히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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