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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철 Aug 27. 2020

비빔밥의 철학


“먹을 만큼만 음식을 퍼 가세요.”

“음식물을 남기지 마세요.”    


국내 5대 사찰 중 하나인 경남 양산에 위치한 통도사 공양간 입구에 적혀 있는 문구입니다.

속세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중생들은 무엇을 하든 딱 알맞게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익숙해지면 속세의 조직에서 뒤처지거나 스스로 도태됩니다.

직장에서는 매일 매월 달성해야 할 실적이 정해지고, 그 실적을 채우기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닙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실적을 100% 달성해도 책임만 면하는 공동 꼴찌입니다.

그러다 보니 초과 달성을 하게 되고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주기도 합니다.

어떨 때는 숫자만 초과 달성인 허수로 채우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삼정의 문란을 보는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실적이 능력자 무능력자 판단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대부분의 직장인은 실적의 올가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 공양간 입구에 줄을 서서 기다린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욕심과 집착의 불씨가 서서히 고개를 내민다. 

나도 모르게 경쟁심의 도화선에 불씨가 닿자마자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예 뒷전이다. 

왕궁에서 태어나 29세에 출가, 35세에 득도, 80세에 열반에 드신 부처님은 인간의 모든 생로병사를 넘어섰으니 비빔밥 하나 알맞은 양으로 비비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닐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각종 세금이 부과되는 속세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살아가는 중생들은, 먹을 만큼 음식을 퍼가는 일이 부처님의 생각만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오늘만이라도 적당한 양을 퍼 담아야지 하는 일말의 불심을 가지고 애써 태연한 척 기다린다.    


드디어 내 차례입니다.

밥주걱을 손에 잡았습니다.

광화문에서 서울을 지키는 이순신 장군의 그 긴 칼을 잠시 빌린 기분입니다. 

칼자루를 잡듯이 힘주어 밥주걱을 잡습니다.

반 주걱 정도 밥을 퍼 담고 그릇을 내려다봅니다. 

아니지, 오늘은 부처님 생신인데 맛있게 먹어 주는 게 예의지 싶어 또 반 주걱의 밥을 퍼 담습니다.

말이 반 주걱이지 마음은 한 주걱씩 퍼 담고 있습니다. 

콩나물을 밥 위에 올려놓고 보니 조금 모자란 느낌이 듭니다.

또 한 집게 더 담습니다, 

각종 나물도 한 집게 더 담고 더 담아 공양간 식당 자리에 앉았습니다.

넘칠 정도로 꽉 찬 그릇을 내려다봅니다.

가슴이 뿌듯하고 평소에 없던 불심이 갑자기 솟아납니다.

초대하지 않아도 부처님 생신날 매년 와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계란 프라이 대신 부처님의 자애로운 미소를 얹어 정성껏 비빕니다. 

약사여래 님의 손을 빌려 가족의 건강을 빌며 또 비빕니다. 

한 알의 밥알도 식탁 위에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뱃속의 마귀들이 입을 벌려 첫 숟가락을 달라고 아우성칩니다. 


부처님이 욕심 많은 내게 화수분 밥그릇을 주신 모양입니다. 

아무리 퍼먹어도 비빔밥의 양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릇의 반 정도 비웠을 때부터 주위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집니다. 

배는 부르고 비빔밥은 먹어도 먹어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습니다.  

원래 마귀란 놈은 제 속만 차리면 나 몰라라 하는 속세의 대표적인 속물입니다.

비빔밥이 반이나 남았는데 배가 불러 터질 것 같다며 뜬금없이 아가리를 닫고 묵언 수행 중이랍니다.     

이 귀한 비빔밥을 남기면 부처님의 그 큰 손바닥이 내 뒤통수를 내리칠 것 같은 느낌입니다.


모든 가족이 속세에서 성공할 때까지 자신은 결코 부처가 되지 않고, 오직 가족을 위해 살겠다는 자칭 지장보살인 아내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왜 쓸데없이 욕심을 부렸냐는 설법을 가장한 잔소리를 듣고서야 비빔밥 공양은 끝납니다. 비빔밥은 평소 먹는 밥의 이 분의 일 아니면 삼 분의 일 정도에, 각종 나물을 넣고 비벼 먹는 것이 적당량임을 모르는 바는 아닌데, 사찰 공양간에만 가면 나도 모르게 욕심을 냅니다. 

세속 욕심에 물들어 비빔밥 하나 적당량 맞추지 못하는 집착 덩어리가 됩니다. 


일주문을 뒤로하고 뒷머리 긁적이며 묵언 수행 중인 마귀들은 부처님께 맡기고,

죄송한 마음에 졸시 하나 남겨두고 세속 깊숙이 걸어 들어갑니다.    

 


비빔밥의 철학    


먹을 만큼만 음식을 떠 가세요 

음식물을 남기지 마세요

통도사 공양간 긴 줄을 기다리는 동안 

이 안내문을 몇 번이고 읽어 본다

빈 그릇을 잡는 순간 마음은 벌써

세 그릇을 들고 있다

매번 주위 사람들 눈치를 살피며

부처님 앞에서 욕심을 숨기려

마지막 한 숟가락이 

입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노동 아닌 노동이 끝난다    


밥과 나물 서너 종류 비비는데

적당한 양 맞추지 못하고 돌아서는데

불이문까지 마중 나온 부처님이

잔잔한 미소 가득 담은 세상 밥그릇 하나

손에 쥐여 주신다

잘 챙겨 조화롭게 비비며 사시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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