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그때 그랬었더라면
“그때 그랬었더라면 지금과는 다르게 살고 있을 것 같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때 왜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했었을까? 너무 후회(後悔)되고 아쉬워.”
“그럴 수는 없지만, 만약 다시 그 시절로 되돌아간다면 정말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왜 하겠어?”
선택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자신의 힘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에는 학교나 학과, 연애상대, 결혼상대, 직업이나 직장, 거주지, 옷, 음식 등이 있다. 선택할 수 없는 것에는 지구, 시대(時代), 우연(偶然), 과거(過去), 사람의 몸, 나라, 부모형제 등이 있다.
미시적(微視的)인 눈으로 보면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커 보인다. 하지만 거시적(巨視的)인 눈으로 보면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이 개인에게 훨씬 더 큰 영향을 준다. 긴 역사를 통하여 개인은 조금씩 선택의 폭을 넓혀 왔지만, 대체로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삶을 지배한다. 역사의 진보를 개인의 선택폭과 영향력의 확장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것은 ‘그때 그랬었더라면’에 해당하지 않는다. 자신의 책임이 아니므로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남자라는 사실을 슬퍼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시대를 거슬러 200년 전으로 갈 수도 없고, 자신의 과거로 되돌아가 그때의 잘못을 고칠 수도 없다.
어떤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것 외의 다른 것들을 배제(排除)한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의 길만 있고 다른 선택지(選擇肢)가 없는 경우에는 선택이라는 말을 아예 사용할 수 없다. ‘그때 그랬었더라면’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에 한정(限定)된다.
‘그때 그랬었더라면’은 상상(想像)이다. 동화나 소설 영화의 소재로는 가치가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무의미한 말이다. 과거는 선택할 수 없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과거에 들어있는 의미를 재해석하고, 그것을 미래의 선택에 참조하는 것이다.
우리가 종종 ‘그때 그랬었더라면’을 생각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남부끄럽고(수치감) 제부끄러웠던(죄책감) 일을 후회하기 때문이다. 원하지 않은 사고를 당해서 억울하고 한스럽기 때문이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또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때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좀 더 용감했었더라면. 그에게 좀 더 친절했었더라면. 좀 더 부지런했었더라면. 그때 다른 걸 선택했었더라면. 그 사람과 좀 더 가까웠었더라면. 그때 그걸 알았었더라면. 그때 거기에 가지 않았었더라면. ……·.
아무리 ‘그때 그랬었더라면’을 되새겨도 어차피 ‘그때’라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러면 ‘그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까? ‘그때 그랬었더라면’은 어둡고 아프다. 어떻게 해야 그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첫째로, ‘그때’를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하나의 ‘선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때 그랬었더라면’은 과거를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선택이다. 그 선택으로는 후회라는 어둠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후회는 ‘그때’라는 족쇄로 자신을 구속하는 번뇌의 마음이다. 반성(反省)과 후회는 다르다. 반성하되 후회는 하지 않아야 한다. 반성에는 통찰의 힘이 따르지만 후회에는 분노가 숨어있다.
둘째로, 스스로 만든 족쇄를 풀기 위해서는 과거의 일을 ‘하나의 사건(事件)’으로 보아야 한다. ‘그때 그랬었더라면’ 대신에 ‘그때 그랬었지’라는 태도로 ‘그때’를 대해야 한다.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마치 오래된 사진을 보듯이 관찰자의 눈으로 과거를 보아야 한다. 그럴 때 과거는 아픈 기억이 아닌 어떤 추억으로 남게 된다.
셋째로, 그때 그랬었던 모습을 나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장점만이 아니라 단점이나 약점도 자신의 것이다. ‘그때 그러지 못했던’ 것도 자신의 모습이다. 행복하고 즐거웠던 과거만이 아니라 괴롭고 부끄러웠던 과거도 자신의 삶이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어루만질 수 있어야 한다. ‘어린 나’를 ‘어른 나’가 보듬을 수 있어야 한다.
단체 사진 속 많은 사람 중에서 어떻게 나를 찾을 수 있을까? 나는 나이기 때문에 찾을 수 있다. 나는 다른 사람과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사진을 버리지 않고 고이 간직하는 까닭은 ‘그 모습 그대로가 나’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어디 외모뿐이겠는가? 개인이 살아온 삶(個人史) 역시 남다른 고유성(固有性)을 품고 있다. 나같이 산 사람은 온 우주에서 오로지 나뿐이다. 자신이 자각하지 못할지라도 ‘나’가 절대적(絶對的)인 존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프리드리히 니체(F. W. Nietzsche)는 운명애(運命愛, Amor Fati)’를 강조했다. 자신의 빛과 어두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고 했다. 그대로 괜찮다는 것이다. 지상의 삶을 부정하고 저 하늘의 삶을 추구하는 것은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칼 융(Carl G. Jung)은 자기실현을 하기 위해서는 자아의 어두운 그림자를 알아차려야 한다고 했다. 자신의 그림자를 직면하고 받아들여야 성숙한 인격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에릭 에릭슨(Erik H. Erikson)은 자신의 전 생애 그대로를 곧 자신으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태어나서 늙을 때까지의 삶 전체를 통합(統合)해야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고 조언했다. ‘그때 그랬었더라면’이 아닌 ‘그때 그랬었지’의 태도를 지녀야 평안하게 늙을 수 있다고 했다. 삶을 온전하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만약 내가 과거로 되돌아가면, 정말로 그때와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마 과거와 똑같은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 그때 그런 선택을 한 까닭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어리석었고 게을렀고 유혹에 빠졌었던 것처럼, 설령 되돌아가더라도 여전히 어리석고 게으르고 유혹에 빠질 것이다. 그때의 내가 그런 사람이었던 것처럼, 과거로 되돌아간 나도 여전히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처한 상황이 똑같다면 판단 역시 똑같을 것이다.
자신의 과거 ‘있었던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또 현재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긍정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예의’다. 과거를 ‘그때 그랬었더라면’이 아닌 ‘그때 그랬었지’로 이해하고, ‘이제 이렇게 하자’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