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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보리 Sep 04. 2023

숲길에서

9. 기준(基準)

  오른쪽과 왼쪽을 말할 때 기준은? 자신의 몸이다. 성공의 기준은? 자신이 세운 목표다. 

  살면서 우리는 크고 작은 목표를 갖는다. 육상 선수의 목표는 잘 달리는 것이고, 발이 불편한 사람의 목표는 잘 걷는 것이며, 불면증으로 고통받는 사람의 목표는 잠을 잘 자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달성했을 때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이 원하는 목표를 ‘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지금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바로 대답할 수 있는가? 비교적 쉽게 대답을 할 수 있다면 당신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아는 사람이다. 이와 달리 얼른 대답을 할 수 없다면 자신이 가려는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이 성공적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자신만의 기준’이 없는 것이다.

  목표가 분명하지 않다고 해서 꼭 헤매면서 사는 것은 아니다. 자신만의 확고한 목표가 없는 경우에는 대개 통념(通念)을 따라 산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자신도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남들이 싫다고 믿는 것을 자신도 싫다고 생각하며 산다. 나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남으로 사는 것이다. 대개 그렇게 산다.

  그런 삶이 꼭 부도덕하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다. 도리어 세상 사람들은 통상적인 성공 기준에 맞추어 사는 그를 편안하게 생각할 것이다. 아주 잘 적응하는 현실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심지어 긍정적으로 평가할 가능성이 높다. 그의 성공 기준은 자신이 정립한 기준이 아닌 통념이다. 

  나아가 그는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인 통념을 타인에게도 적용한다.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 역시 자신의 것이 아닌 통념인 것이다. 그에게서 자신만의 세상을 찾기는 힘들다. 때로 그가 자신만의 개성을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개성 역시 통념에 젖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물질주의적이다. 만사를 돈의 크기로 재려 한다. 우리가 이렇게 물질주의에 매몰된 까닭은 무엇일까? 여러 사회문화적 역사적 배경이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통념은 성공의 기준이 돈의 크기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자신만의 정립된 기준이 없는 사람들은 그 통념에 허리를 숙인다. 자신이 소유한 돈의 양을 늘리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사회적 지위, 학력, 미모, 지연(地緣), 사기, 폭력 등은 물론이고, 종교적 문화적 권위도 기꺼이 악용한다. 아무런 반성 없이 정신세계를 타락시킨다. 

  마이크를 잡고 악을 쓰며 신(神)을 팔아 돈을 버는 혐오스러운 종교권력자들이 광장에서 소란을 피우고 여러 매체를 가득 채운다. 자신의 영혼을 푼돈에 팔아넘긴 기레기(기자 + 쓰레기)가 부끄러움 없이 큰 소리로 진실을 왜곡하고 거짓을 퍼뜨린다. 합법적으로 권력을 부여받은 법의 집행자들이 ‘조직에 충성한다.’는 구호 아래 ‘법의 정신’을 시궁창에 박아버린다.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고 현실이다. 왜 그런 짓들을 할까? 돈을 모으기 그러는 것이다. ‘돈의 신’이 우리 사회의 통념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밥과 옷, 집과 차는 무엇을 위해서 있는 것일까?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 밥 옷 집 차의 다른 이름인 돈은 그 자체가 목표일 수 없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이다. 더 많은 밥, 더 좋은 옷, 더 비싼 집, 더 멋진 차가 궁극적인 목표일 수 있을까? 소유물 즉 돈이 삶의 진정한 목표일 수 있을까? 놀랍게도 어떤 사람은 자발적으로 돈의 신전에 자신의 삶을 바치기도 한다. 끔찍한 현실이다.

  온갖 소유물이 사람의 참된 목표가 아니라면 무엇이 사람의 참된 목표인가? 사람의 성공의 참된 기준은 무엇인가? 사람 자체다. 사람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사람이라면, 사람이 어떠해야 한다는 말인가?

  돈이 큰소리치는 곳에서는 사람이 희미해진다. 사람이 돈 버는 수단이 되어버린다. 뒤집어진 세상에서 제정신을 차리기는 쉽지 않다. 거꾸로 된 현실을 다시 뒤집고 제정신을 차릴 때, 사람이 돈보다 더 고귀함을 알아차릴 때, ‘인간성을 회복했다.’고 말한다.

  인간성을 한 번 회복했다고 해서 늘 그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늘 ‘인간성의 회복과 상실’ 사이를 오가며 산다. 정신을 차렸다가 잃고, 잃었다가 다시 회복하기를 거듭하며 산다.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알아차리면, 회복의 시간을 더 길게 확보하려고 거듭 노력하면, 사람답게 사는 시간이 길어진다. 소유물에 매인 존재가 아닌, 소유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로 변할 수 있다. 이처럼 인간성을 회복하고 성장했을 때, 성숙(成熟)했다고 말한다. 사람의 성공의 참된 목표는 소유물의 크기를 늘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숙에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성공했는가를 알려면, 그가 얼마나 성숙했는가를 보면 된다. 그가 소유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살피면 된다. 어떤 사람의 말과 태도가 사람을 지향하는지, 아니면 소유물을 지향하는지 알게 되면, 그가 성숙한 성공적인 사람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다. 

  석가의 자비와 예수의 사랑이 위대한 까닭은 바로 생명을 또 사람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유물에 집착하지 마라.’,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탐욕을 내려놓아라.’ 등은 모두 이런 맥락 속에 있는 말들이다. 생명 없는 것을 위해 생명을 희생시키지 말라는 깊은 속뜻이 들어있는 것이다. 

  물론 밥을 먹어야 산다. 밥을 먹어야 산다고 해서 밥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먹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과식을 성공으로 생각하며 산다. 온갖 매체와 타인들이 그런 분위기를 부추긴다. 많이 낭비하는 자가 더 크게 성공한 자라는 주장이 우리의 눈과 귀를 어지럽힌다. 이런 통념과 싸우지 않으면, 이런 통념으로부터 자신을 구해내지 않으면, 자신의 인간성이 상실된 상태를 방치하는 것이다. 인간성을 회복하지 못한 채 미숙한 상태로 사는 것이다.  

  성숙은 사람이 갖추어야 할 성공의 참된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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