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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에서

41. 함께 즐겨요

by 걍보리

커피에 우유를 타서 전자레인지에 넣고 시작버튼을 누른다. 독특한 고주파 발진음이 ‘우우웅’ 울린다. 거실에서 놀던 아이가 소리 나는 쪽으로 재빨리 기어 온다. 전자레인지의 탁음(濁音)에 귀를 기울이고 희미한 주황색 불빛에 주목(注目)한다.

개수대에서 설거지를 하면 아이는 설거지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손으로 싱크대 문을 붙잡고 까치발을 선다. 키가 작아 개수대 안을 볼 수 없다. 내 바지를 붙들고 고개를 들어 내 눈을 쳐다본다. 때로는 양팔을 들어 올리고 ‘우우’ 하면서 칭얼댄다. 자기를 안아 올려 개수대 안을 보여 달라는 뜻이다. 아이를 안아 올려 러닝타워 안에 세워준다.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를 듣고 싶고, 흐르는 물을 손으로 만지고 싶어 안달이다. 물이 흐르는 수도꼭지에 꼬막손을 내밀어 물을 만질 수 있게 해 주고, 설거지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아이는 옹알이를 하면서 일하는 과정을 살핀다. 작은 손을 내밀어 건조대 안의 그릇들을 만지작거린다.

세탁기가 ‘위잉 위잉’ 소리를 내면서 작동한다. 세탁기 소리를 듣자마자 아이는 장난감을 뒤로하고 세탁실로 향한다.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면서 서둘러 기어간다. 할머니도 아이를 따라 세탁실로 향한다. 아이는 세탁기 안에서 세탁물과 거품물이 섞이고, 좌우로 어지럽게 흔들리는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무엇이 그렇게 궁금한 것일까?

아이는 호기심 덩어리다. 무엇이든 관찰하고 만져보고 입으로 가져간다. 온갖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때로는 규칙적인 음악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든다. 장난감 차를 타면서 환하게 웃는다. 숨바꼭질을 하면서 숨고 찾기를 즐긴다. 첫돌을 맞은 아이가 만나는 모든 것은 늘 첫 만남이다. 하늘 땅 나무에서부터 옷 음식 장난감에 이르기까지 첫 만남이 아닌 것이 없다.

만남 만남마다 새 세상이 꽃처럼 피어난다. 아이가 보고 듣고 만지는 것들은 아이와 함께 아이의 세상을 연다. 아이가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사실은 경이롭다. 종종 아이의 맑은 눈동자를 쳐다본다.

‘지금 이 아이에게 열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진실을 온전히 아는 사람은 없다. 오로지 아이 자신만이 느낄 뿐이다.

호기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사물과 접촉하는 아이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왜 그렇게 행동하지?”

아이는 이렇게 답할 것 같다.

“궁금해요. 이것저것 보고 듣고 만지고 싶어요. 이유요? 저도 잘 몰라요.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요.”

아이는 보고 듣고 만지는 행위를 즐긴다. 아이에게 산다는 것은 논다는 것이다. 아이의 모든 행위는 놀이다. 놀이를 하면서 아이는 타고난 생명력을 드러낸다. 놀이를 통해 아이는 온갖 사물과 함께 춤을 춘다. 본디 삶은 춤이다. 즐거움이다.

아이를 보면서 나는 반성한다. 삶에 대한 회의(懷疑)와 염세(厭世), 미래에 대한 비관(悲觀)적 전망은 내 생각이 만들어낸 허구(虛構)가 아닐까? 망상(妄想)이 아닐까? 내가 지닌 대부분의 근심 걱정은 지나친 탐욕의 그늘이 아닐까? 오늘 하루를 감사할 줄 모르는 어리석음 탓은 아닐까?

내가 밀어주는 꼬마자동차에 앉아있던 아이가 문득 고개를 위로 쳐든다. 아이의 까만 눈과 내 눈이 마주친다. 아이가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할아버지, 무슨 생각이 그리 많으세요? 그냥 이 시간을 함께 즐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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