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3장의 시놉시스
기억한다. 비가 많이 왔다. 영화처럼 우아하게 고급 바 같은 곳에서 양주를 마시고 싶었지만 현실은 무말랭이와 시금치를 놓고, 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카톡을 주고받던 네가 궁상떨지 말라며, 치킨 쿠폰을 보내줬다. 슬프게도 배달비는 별도였다.
"글쎄. 빨리 포기하고 다른 걸 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축구도 했고, 영화 제작부도 했다면서요? 그냥 그거 해요. 작가 안 될 거 같으니, 빨리 포기해요. "
교육원 연수반에 올라갔을 때. 3장의 시놉시스를 읽은 연수반 선생님이 나에게 했던 말이다. 3장이다.
35매의 단막극 극본을 제출한 것도 아니었다. 3장. 겨우 3장의 시놉시스였다.
2500원. 동전으로 배달비를 만들었고, 네가 보낸 치킨 쿠폰으로 주문했다. 배달에 40분이 걸렸다. 그 사이 소주를 4병이나 더 마셨다. 하필이면 매운 치킨이었다. 그때쯤 네가 전화를 했다.
"치킨 맛있냐?"
"맵다. 더럽게 맵다."
2. 언어와 문장의 차이
언젠가 네가 축구클럽에 와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나를 보며 말했다.
"어릴 때. 왜 그렇게 선생님이 우리 혼냈는지 알겠다. 애들 가르치는 거 안 답답하냐?"
혼나고, 욕먹고, 맞고, 우린 그렇게 배웠다. 선생님의 눈빛과 손짓과 말 한마디에 가슴이 출렁이고 겁났다.
그렇기에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언어에 조심한다. 물론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연령이 낮은 이유도 있지만
내가 배운 것과 다른 방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었다.
절대 아이들에게 하지 않기로 다짐한 언어를 나는 메모지에 적어 컴퓨터 모니터 옆에 붙여 놨다.
'안 돼. 그렇게 하면 절대 안 돼. 왜 그렇게 해? 그게 안 돼?'
부정적인 언어를 쓰지 않으려고 애쓴다. 배움에 있어 정답은 없고, 결과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과정에 있어선,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삶을 뒤흔들 수 있다. 그러자 언어의 무게감을 깨닫게 되었다. 이상하게 글을 쓸 땐, 지우고, 수정하고, 다시 고쳐쓰기를 반복 하지만, 언어는 가볍게 뱉어낸다.
그래서 아이들을 가르치러 갈 때. 프로그램 계획표 종이에,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언어를 문장으로 적어둔다. 언어의 가벼움을 조심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다.
3장의 시놉시스를 읽고 평가한 연수반 선생님은 이후, 내가 제출하는 시놉시스에 대해서 피드백을 해주지 않았다. 내 꿈이 3장의 시놉시스로 평가받은 것 같아 화가 났다. 몇 개월의 수료가 끝나고, 연수반 선생님은 교육원 복도에서 나에게 말했다.
"솔직히 말할게요. 전문반으로 추천 안 올렸어요. 근데 또 교육원 등록할 거예요?"
"네."
"돈 아깝잖아요? 하던 거 해요. 왜? 안 되는 작가를 하겠다고 애써요? 포기하는 것도 성장이에요."
내 어깨를 툭툭 치고 돌아서던 그 선생님의 뒷모습을 잊을 수 없다. 텅 빈 복도에 갈길은 두 군데였다. 앞으로 가느냐, 뒤로 가느냐, 그 단순한 걸음조차도 혼란스러웠다. 내가 가는 걸음이 맞는 걸까?
연수반이 끝난 후, 짧은 여행을 했고, 돌아왔을 때, 불면증이 찾아왔다. 모든 정신적 질환의 시작은 불면이다. 다시 병원을 찾았고, 약 복용량을 늘렸다. 무기력하게 며칠을 보냈을 때.
네가 또 치킨 쿠폰을 보냈다. 똑같이 매운 치킨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비가 왔던 그날처럼 맵지 않았다. 먹을 만했다. 견딜만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다시 글을 썼다. 전문반에 등록했고, 꾸역꾸역 습작을 썼고, 결국 창작반까지 졸업했다.
비록 TV에 드라마 한 편 방영하지 못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글로 밥 벌이는 하며 지낸다. 나는 내가 쓴 글들을 프린트해서 작은 박스에 넣어둔다. 언젠가 그 박스를 열어봤다. 부끄럽고 미흡하고 어색한 글 들. 활활 불태워 없애 버리고 싶은 작품들. 참 많이 썼다.
687장. 내가 썼던 글들의 장수다. 3장의 시놉시스를 보고, ' 작가 안 될 거 같으니 빨리 포기해요. '라고 말한
연수반 선생님을 다시 만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쓴 687장의 글을 읽어주실 수 있는지 묻고 싶다. 또한 여전히
그때와 같은 말을 내게 할지 궁금하다.
부끄러운 글들이지만 687장이 내 이력서고, 자기소개서며, 내 습작이다.
연수반 선생님에게 감사하게 생각한다. 악연으로도, 삶은 배울 수 있단 걸 깨닫게 해 줘서 말이다.
687장의 글을 썼지만, 나의 글쓰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1장을 쓰기 버겁고, 깜빡이는 백지의 한글 문서 창 커서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등교하는 학생들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그렇게 또 몇몇 밤을 새운다.
그러니 조금은 자신 있게,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다.
한 장의 이력서와 몇 장의 자기소개서로 평가받는 것에 두려워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