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휴가 나온 너가 가끔 나와 조기축구를 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 팀 조기축구 아저씨들은 선출인 너를 열정적으로 맞이했다. 동네 축구에 프로축구 선수가 왔으니, 지금 생각하면 상대팀 아저씨들이 엄청 짜증 냈던 것도 이해가 됐다. 그런 어느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새벽에 조기축구를 가기 위해, 거실에 있었을 때. 안방에서, 아버지가 나오셨다. 밤새 맥주를 마셨다. 대화는 없었다. 아침이 왔을 때. 아버지는 안방으로 들어가셨고, 몇 분 후, 안 방 문을 열었을 때. 그곳에 아무도 없었다. 그날 아침. 너가 날 데리러 집에 왔을 때. 나는 아무도 없는 안방에서 한참 아버지를 찾았다. 그런 나에게, 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 아버지 돌아가신 지 벌써 몇 해 됐잖아. 왜 그래?" 그제야, 거실에 나 홀로 마신 캔 맥주들만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2. 빨간 약이든, 파란 약이든, 결국은 먹을 용기가 필요하다
너도, 나도, 어린 시절에 운동할 때. 아픈 걸 참 많이 숨겼다. 난 무릎에 금이가고도 경기에 뛰었고, 너는 발목 인대가 찢어진 상태에서도 뛰었고 그땐 참. 왜 그렇게 아픈 게, 잘못인 것 같았는지! 승, 패가 중요했기에 우린 스스로 몸 관리하는 것들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아파서 뛰지 못한다는 자체가 죄인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가끔 축구클럽 아이들을 가르칠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스스로 몸 관리하는 것도 능력이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된다. 생각해보니 정신과 병원도 너가 소개해줬다.
한참 진료를 받길 거부했던 나에게, 너는, "인간 다 아파. 각자 부위가 다를 뿐"이라는 말이 참 큰 힘이 됐던 거 같다. 그날을 기억한다. 20대 초반. 청춘의 첫출발이 정신과라니, 몇몇 낯선 검사지를 붙잡고, 솔직하게 체크했다. 무슨 심리테스트도 아니고, 사실 신뢰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상담했던 의사의 첫 질문은 기억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주무신 게 언제죠?"
이틀? 사흘? 조금씩 쪽잠을 자긴 했지만, 생각해보니 엄청난 불면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실 거기 의사는 친절하지 않았다. 의무적인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가고 한 움큼의 약을 처방해줬으나,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쓰레기통에 몽땅 버렸다. 그깟 알약에 의존해서 일상을 버티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후회했다. 너도 알다시피 안이했던 나의 무지의 대가는 컸다. 나중에서야 내가 겪고 있던 질환이 조울증이라는 걸 알게 됐다. 결국 군대에선 조울증(양극성 정동장애)으로 의병전역, 4번의 정신과 입원, 자살시도, 폭력, 폭음, 무엇하나 일상적인 삶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제야 약에 의존했다. 어린 시절 운동선수로 아픈 걸 참고, 무지하게 뛰었던 것처럼, 정신적 아픔을 멍청하게 참았고, 20대 청춘의 모든 삶을 대가로 지불해야 했다.
"아픈 건 죄가 아니야. 그걸 숨겨서 곁에 있는 사람을 힘들게 하면 그게 죄지."
4번째. 입원했던 정신병원 병동에서, 약을 챙겨주던 나이 지긋한 간호사분이 했던 말이다. 그날 이후, 나는 나 스스로의 감정에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있었다. 꾸준한 치료와 약물 덕분에 이젠 책상에 앉아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가끔 엄청난 불면에 잠 못 이루고,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이어가다, 걷잡을 수 없는 조증에, 감정이 폭발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내키진 않지만 한 움큼의 약들을 먹고, 긴 잠을 청한다.
물론 나의 20대가 모두 다 엉망이진 않았다. 몇 번의 긴 여행과, 몇 명의 좋은 사랑과, 몇 장의 글들을 남겼으니 말이다. 여전히 나는 치료를 받고, 약을 먹고, 상담을 받는다. 이젠 내가 아프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조울증 환자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는다. 나의 가장 큰 부끄러움은 무지했던 20대의 나날이었을 뿐.
언젠가 너가 물어봤다.
"너, 참 많이 편안해 보여. 신기해. 뭐, 마법의 알약 같은 거냐?"
"글쎄. 마법의 알약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처먹어봐야지. 그걸 안 처먹고, 그 대가를 치렀으니"
아프다고 소리치는 것도, 결국 용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