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글쎄요, 매거진 3호] 서촌의 빨간 간판

몽골로 떠나기 전에

by 낙서



안녕하세요, 가을에 인사 올립니다.


시월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달인데요

하하 그래서 해마다 구월이면 시월 생각에

미리 맘 들뜨고 뭐 그랬었네요.


올해는 뭐,, 실은 아직은 딱히...하하.


(나이 먹어서 그런가)

(금방 재밌는 일 생기겠죠 뭐...^*^)


뭐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팔월에는 몽골에 다녀왔었는데요

언제 쓸까, 언제 쓸까 하다가

연휴 때 쓰면 적당할 것 같아

하나씩 꺼내어 보려고 합니다


다만,


제 블로그 서로이웃 분들은

이미 스포를 당한 글이겠군요...^*^


몽골로 떠나기 바로 직전에

살짝 올리고 갔던 글입니다.








이십대 초반에는 회복이 필요할 때 나와 연애를 한다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 일시적이라도 회복이 되었다. 좋아하는 것들을 쫓으며 차분함을 흐뜨렸고 삶의 동력을 만들고 싶어 욕심이라는 것들도 만들어내고는 했다. 삶이 덧없고 허무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인간의 의지만 있다면 의미있는 하루와 미래를 일구어내리라, 뭐 그렇게 믿으며 살아갔던 것 같다. 깡도 좋았다. 운이 있다 한들 인간의 자유의지가 더 강하지 않을까? 싶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 말로 꺼내지 않을 뿐 각자의 절망과 기쁨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을 안다. 하루를 곱절로 먹을수록 더 잘 알게 된다. 그래서 울 곳이 없다. 인간은 울 때 울고 웃을 때 웃으며 살아가야 하는데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어른스러움을 강요한다. 허구의 어른스러움을 강요한다.


세계에는 질서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그 중에서 시대의 껍데기가 만들어낸 질서에만 동의하며 살아가는 세대이다. 나 역시 그 질서와 기준에 동의하며 살아갔지만 뭘 해도 허무하다면 그 기준은 이제 아무런 힘이 없다.


그래서 몇 년 만에 서촌의 빨간 간판이 그리워 갔다.


*


흰당나귀.jpg 밤에는 하얗게 빛나는 빨간 간판


*


인간은 무력하기에 나도 무력하다

그 무력함을 인정하고 싶어서 그 곳에 갔다

나는 아직 세상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많아 그 곳에 갔다.


우리는 목격자의 신분으로 이 지구에 왔고

이제 끝도 없는 증언을 늘어뜨리며 살아가야만 한다


그런데 변수가 하나 발생해버렸지 뭐람


언어를 잃었다

내 언어를 잃어버렸다.


*


나는 언어를 잃어버렸는데 사장님의 문장들은 여전히 맑고 귀하다. 고작 스물 둘에 몇십년의 수행을 펜 끝에 쏟아 부은 문인들을 직접 마주하고 대화할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 그 당시 내게 커피 한 잔과 시집 한 권을 선물로 주셨던 모 교수님의 말씀처럼.


사장님,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없을 수 있어요, 그런데. 목적의식이라는 것이 없어요. 제게 허락된 땅도 없고요. 그게 문제예요. 뭘 이루고 얻어도 과연 제가 행복하고, 즐거웁게 살 수 있을까요?


사장님께서 늘 그렇듯 본인의 이야기를 찬찬히 풀어주셨다. 쉰이 넘어 펜을 다시 잡고 처음 등단하던 그 시절부터 주욱 글을 쓰는 지금까지. 정답을 열기 보다는 그저 당신의 이야기를 풀어주셨다. 어떠한 강요 없이.


*


이 곳에는 다양한 나타샤들이 방문한다. 사장님은 이따금 그들에게 실례되지 않는 선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하셨다. 굳이 대신 전해주시지 않으셔도 그들이 직접 방문해서 내게 들려주기도 하였다. 이번 팔월이 딱 그랬다. 간판 이름에 이끌려 왔다는 일행을 사장님은 '나타샤 두 명이 왔네.'라며 반기셨다. 두 나타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으며 살아가고자 하는 손님들이었다. 연결사는 역접, Nevertheless. 별의 별 풍파 다 맞아 본 공일학번, 그리고 그보다 더 윗 학번인 손님. 나는 공일년생인데 그들보다 더 체념하며 살아가니 우습다. 의지, 운, 그리고 우리가 서로에게 지닌 의무란 무엇인가.



세시간 반의 대화



나보다 몇십년을 더 희노애락을 겪은 이들은 다 지나가고 흘러가리라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이 결코 인생이 덧없고 허무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세상에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고도 말한다. 그런데 이 말 또한 결코 인간이 무력하고, 자유의지가 허락되지 않은 존재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모순이 발생했다. 명제가 잘못된걸까, 라기에는. 두 나타샤의 눈빛이 강인했고, 사장님의 눈가는 한 없이 평온했다.


*


몽골에 다녀오면 좀 비워질 수 있을까? 왜 하필 몽골이었는지, 또 왜 하필 지금이었는지에 대해 딱히 설명할 수 있는 이유 따위는 없다. 럭비공 인생인지라 늘 그렇듯 별 이유 없이, 그저 꼭 그때 그 곳에 가야만 할 것 같아서 생애 처음으로 비행기 티켓을 끊었고. 뭐 사실, 몽골에서 시간만 떼우고 와도 별 상관 없을지도 모른다.


*


밤 열한시 제법 넘었을 때

막차 놓치기 직전이었어서

급하게 가게를 나섰다


그 바로 직전에

내가 스물둘 때 썼던 시 한 편의 일부를 드리고 갔다

감히 드리고 갔다




늙어가는 벽에 붙여 놓았지

오래전, 열여섯 네 손으로 품었던 야광 별 하나

그 스티커도 창백하게 질려 버린다


스티커, 를 품은 네 엄지, 검지


품었던 네 손가락 하나가 눈에 잡힌다

마디 사이의 주름도 곱게 잡혔지

모난 손톱에도 생이 흘렀다


잠깐 보랏빛 혈기 띄웠지


오랜만이야




사장님이 그러셨다


-저는 이제 삶에 여한이 없어요.-


-오늘 죽어도 상관 없어요.-


-다들 넌 왜 이렇게 즐겁니, 라고 묻는데

즐거워야 하지 않을까요?-


*


이 말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나는 아직 인생을 충만히 살지 못했다


*


이야기가 한 참을 향해 가던 즈음이었을까


갑자기 사장님의 얼굴에

별안간 따뜻한 미소가 퍽 내려앉았다


-자네의 앞으로가 기대되네.-


그 한마디가 아직은 부끄러워

사장님은 여행 가시면 무엇을 하시며 보내세요? 라고 돌려 여쭸다.


사장님은 아무것도 안 하고 좋아하는 것만 하며 쉬다 온다고 하셨다

로컬술집들을 찾아다니며, 딸들과 함께 술 한 잔 하며.


나는 아직 여행을 즐기는 법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


몽골에 가기 전

사장님께 문자 한 통이 왔다

막차 놓쳤을까봐 걱정이 되어 문자가 왔었고

마지막 메세지는 반가워 캡쳐해 갤러리에 저장해두었다.









추석을 핑계 삼아 주어진

짧은 가을 방학 동안

몽골에서 찍었던 사진 많이 들고 올게요


과제를 하고, 할 일을 하고, 작업을 하고, 청소를 하고,


그러다가


몽골이 생각날 때


다시 올게요.







- 새찬 비 쏟아지는 추석, 스물다섯의 다윤 올림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