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거리》

28편 – 애쓰지 않아도 빛나는 당신에게

by 정성균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되는 마음에 대하여

마음이 편안해지자 세상이 고요해졌다. 한때는 나를 증명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던가. 내뱉는 말마다 덧붙이며, 혹여 진심이 오해받을까 불안했다. 그래야만 사랑받고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었을 테다. 타인의 시선은 언제나 두려움이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유령처럼, 살아있음을 증명해야 겨우 숨 쉴 수 있다고 여겼으니까. 당신도 그런 시절을 보냈는지.


시간이 흐르며 깨달았다. 모든 감정에는 적절한 때가 있고, 모든 말에는 필요한 시간이 있다는 것을. 성급히 설명하려 애쓰거나, 억지로 나를 꾸미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어느 날, 바쁜 일상 속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던 순간이 찾아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힘주던 손에 힘을 빼니, 세상이 내 속도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때부터였다. 내 안에 조급함 대신 차분함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 이제는 긴 설명보다 그저 조용히 머무는 시선을 택한다. 누군가를 이해시키려 하기보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 노력한다. 한때 격렬했던 내 마음은 잠잠해졌고, 그 자리엔 깊고 고요한 평화가 찾아왔다. 비바람이 지나간 뒤 잔잔해진 바다처럼, 내 마음속엔 더 이상 거친 파도가 일지 않는다. 이 고요함 속에서 나는 진짜 나를 만난다.


예전에는 사소한 일조차 마음에 깊이 들어왔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시선을 피하는 작은 행동 하나에도 쉽게 흔들렸다. 차가운 말에 발밑이 무너지는 듯했고, 회피하는 시선에 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감정은 늘 외부 자극에 따라 변했고, 나는 그렇게 중심을 잃은 채 흔들리는 갈대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감정에 붙은 물기를 닦아내는 방법을 안다. 모든 말이 나에게 달라붙게 두지 않고, 잠시 머물다 지나가게 한다. 그렇다고 무심해진 건 아니다. 오히려 깊이, 조용히 들여다보지만,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는 않게 되었다. 감정이 흐르는 결을 따라가되, 그 속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내는 법을 서서히 몸에 익히는 중이다. 마음이 요동칠 때마다 잠시 멈춰 그 흐름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며, 더는 감정에 잠기지 않고 그 너머에서 나를 단단히 세우는 법을 배워간다. 마음이 단단해지는 동시에 부드러워지는 이런 변화가 참 신기하다. 예전 같았으면 잠 못 이루고 밤새 뒤척였을 어떤 비난이나 오해 속에서도, 평온함을 느낀 날이 있었다. 그때 문득 내 안에 작은 벽이 생긴 것 같았다. 그 벽은 나를 세상과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거친 파도에서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방패가 되어 주었다. 비로소 감정의 주인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당신은 감정의 파도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지키고 있는가.


손끝에 오래 머문 마음은 말보다 깊은 것을 전한다. 누군가의 손을 조용히 잡았을 때, 온기보다 먼저 느껴지는 건 그 손을 움직이게 한 마음의 흐름이었다. 내 손등에 깊게 새겨진 주름은 그동안 내가 지나온 계절과 마음의 결을 담고 있다. 건넸던 위로, 꾹 삼켰던 말, 조용히 감내했던 서운함까지, 그 모든 순간이 주름진 골짜기마다 고요히 스며 있다. 어떤 주름은 사랑하는 이의 어깨를 토닥이며 생겼고, 또 다른 주름은 떠나가는 사람의 등을 조용히 보내던 손길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때, 그 사람의 온기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시간과 감정을 느끼게 된다. 마주 잡은 손바닥 사이로 흐르는 미묘한 온도에는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고, 우리는 그 조용한 감정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천천히 헤아리게 된다. 오래된 책장을 넘기듯 한 사람 한 사람의 시간을 존중하며, 그 속에 담긴 문장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곁에 머문다. 이 주름진 손은 더 이상 세월의 흔적만은 아니다. 그것은 살아온 날들의 무늬이자, 마음을 건넸던 기억의 지문이며, 내가 사람을 어떻게 품어왔는지를 고요히 말해주는 풍경이다.


사라져도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는 사람이 있다. 그 이름을 오래도록 입에 올리지 않아도, 그 사람이 나에게 남긴 어떤 말, 어떤 표정은 문득문득 떠오른다. 그때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를 만났었는지, 지금도 가끔 나 자신에게 조용히 묻곤 한다. 몸이 멀어졌다고 해서 그 의미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건넸던 따스함은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무른다. 때로는 그 잔잔한 온기가 지금의 내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주기도 한다. 마치 흐르는 강물 속에 잠겨 있던 보석처럼, 예상치 못한 순간에 빛을 발하며 나에게 다시 나타난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가끔 내 안에서 조용히 걸어 나와 말을 건넬 때면, 지나간 시간들이 퍼즐처럼 맞춰지면서 지금의 나를 완성시키는 소중한 조각들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이야기 속에서 서로에게 잊을 수 없는 흔적을 남기며 살아가는 모양이다. 이들은 나를 아프게도 했고, 기쁘게도 했으며, 좌절시키기도 하고 다시 일어서게 만들기도 했다. 모든 관계는 결국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이제는 이해한다.


나는 이제 말줄임표 같은 사람이 되어간다. 예전에는 모든 문장을 마침표로 딱 끝내야만 속이 시원했다. 내 생각을 완벽하게 전달하고, 오해가 생길 틈 없이 다듬고, 빈틈없이 마무리 짓는 말들이었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 끝내지 않은 말, 그 뒤에 남는 여운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더는 설명하지 않아도,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순간을 알게 되었다. 그 말줄임표는 아직 다 말하지 못한 감정의 자리이고, 상대가 스스로 나머지를 채워 넣을 수 있도록 빈 공간을 내어주는 마음이기도 하다. 비어있는 공간이 때로는 아름다운 그림이 되듯이, 채워지지 않은 말이 가장 깊은 이야기를 품는다. 이제 나는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되어간다. 가끔은 침묵이 많은 말보다 강한 메시지를 전달할 때가 있다. 모든 것을 말하려 애쓰기보다,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곤 한다. 이 채워지지 않은 아름다움 속에서 나는 진정한 자유를 느낀다.


마음이 깊어진 시선은 서두르지 않는다. 그 시선은 쉽게 판단하지 않고 그저 바라본다. 누가 어떤 결정을 내렸을 때, 그것을 비난하기보다 그 사람이 여기까지 오기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조용히 궁금해한다. 삶은 짧은 설명으로는 전부 담아낼 수 없는 이야기들로 가득하고, 사람은 그 이야기의 가장 조용한 주인공들이니까. 마음이 익은 시선은 그래서 천천히 움직인다. 그 안에는 '나는 다 안다'는 생각보다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을까'를 묻는 겸손한 마음이 더 많다. 도움을 주려는 특별한 마음보다, 그저 그 사람 옆에 함께 있으려는 조용한 의지가 담겨 있다. 한때는 내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어떻게든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려 애썼다. 내 방식대로 조언하고, 때로는 상처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누군가의 삶에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것은 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옆에 서서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것임을. 최근에 오래된 친구가 힘든 시간을 보낼 때, 나는 아무 말 없이 함께 산책하며 몇 시간을 보냈다. 돌아오는 길에 친구가 '네가 옆에 있어줘서 정말 고맙다'라고 말했을 때, 오히려 내가 더 큰 위로를 받았다. 그때 깨달았다. 사랑은 때로 침묵 속에서 가장 깊이 전해진다는 것을. 고요한 숲에 들어서면 나무 하나하나에 시선이 머물게 된다. 그 감각처럼, 이 순간도 조용히 바라보게 된다. 그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급하게 조언하거나 판단하기보다, 그저 함께 숨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것을 내 시선이 말해주기를 바란다. 이제는 누군가를 애써 바꾸려 하기보다, 그의 곁에 조용히 머물며 그의 시간을 존중하는 쪽을 선택한다.


오래된 찻잔에 물을 붓듯이, 나는 천천히 하루를 채운다. 기억과 감정이 뒤섞여 시작되던 아침은 더 이상 조급하지 않다. 내가 아끼는, 그 향을 기억하는 찻잔을 꺼내듯이, 그날의 기분에 맞는 조용한 나만의 습관을 꺼내어 나 자신을 다독인다. 찬 바람이 부는 날이면 차분한 재즈 음악을 틀고, 몸과 마음이 피곤한 날엔 아무런 특별한 것도 없는 창밖 풍경을 그저 바라본다. 때로는 그저 낡은 나무 탁자에 앉아, 햇살이 창을 넘어 들어오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먼지 한 톨 한 톨이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삶의 모든 작은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의미 있는지 다시금 깨닫곤 한다. 그런 일상은 결코 대단하거나 화려하지 않지만, 그 속에 쌓이는 감정들은 나를 깊이 어루만져 준다. 그래서 나는 매일, 작고 단정한 하루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채워간다. 조금씩 모양을 다듬고 손끝의 감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마음에 닿는 형태가 되어간다. 나의 하루하루를 정성껏 만들어가는 느낌이다. 바쁘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도 나만의 속도로 걷는 법을 배운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오늘 하루를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드는 작은 노력들이 쌓여 비로소 단단한 내가 된다. 이 느리고 반복적인 일상이 나에게 주는 평화는 그 어떤 화려한 사건보다도 값지다.


익숙한 이별을 겪고 나면, 다음 만남에 대한 기대는 줄어든다. 한 사람을 내 마음에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이 어쩌면 영원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와 함께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누군가는 내 삶을 스쳐 지나가고, 누군가는 내 곁에 오래도록 남지만,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그 시절의 나를 만들어준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이제는 그들이 떠나는 모습 앞에서 쉽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애써 붙잡지 않아도, 이미 마음은 충분히 닿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감정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든, 나는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대했다는 것을 안다. 떠나간 자리가 남기는 아련함은 있지만, 그것이 슬픔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자리에 깊게 새겨진 흔적들이 지금의 나를 완성시키는 귀한 밑거름이 된다. 어떤 이별은 마치 오래된 서랍을 정리하듯 담담하게 찾아오기도 한다. 한때 뜨거웠던 인연이 서서히 식어가고, 각자의 길이 자연스럽게 갈리는 순간들을 마주하며 '이것이 삶이구나' 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예전 같았으면 붙잡고 싶어 몸부림쳤을 테지만, 이제는 흘러가는 것을 그저 바라본다. 어쩌면 그 놓아줌이 서로에게 더 큰 자유를 주는 길임을 알게 된 것이다. 마치 가을 낙엽이 미련 없이 떨어져야 봄에 새싹이 돋아나듯, 어떤 끝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을. 모든 인연에는 저마다의 시기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이제는 받아들인다. 그래서 떠나보내는 일 또한 하나의 완성된 과정임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인연 속에서 성장하고, 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것이니까.


텅 빈 공간을 이해하는 시선, 떠나보내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태도, 말보다 깊은 침묵.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굳이 설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나를 보여준다. 누군가를 덜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더 조용히, 더 오래 사랑하게 되었을 뿐이다. 누구에게도 증명할 필요 없는 마음, 오직 나 자신만이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그 마음이 내 안에서 깊이 익어가고 있다. 나는 매일매일 조금씩 더 깊이, '익어간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배워가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굳이 말하려 애쓰지 않아도, 스스로의 빛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삶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삶은 끊임없이 물을 붓고 비우며, 때로는 뜨겁게 끓어오르고 때로는 차갑게 식어가는 찻잔과도 같을 것이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만의 깊이와 색깔을 갖게 되는 것이지.


네 삶의 찻잔에는 오늘 어떤 향이 피어나고 있는가. 그 향기가 네 하루를 따뜻하게 감싸주길, 나도 조용히 응원하고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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