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거리》

29편 – 서두르지 않는 하루의 품위

by 정성균

나이가 들어가면서 삶의 복잡다단함에 대한 피로감은 깊이를 더해간다. 한때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즐기고, 빈틈없는 일정 속에서 나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썼다. 휴대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려댔고, 그 알림 하나하나에 기꺼이 응답하며 나의 존재를 확인받는 듯했다. ‘모두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숨 쉴 틈 없이 돌아가는 하루가 곧 충실한 삶이라는 믿음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비치는 타인의 화려한 일상을 보며, 나 역시 그에 못지않은 ‘바쁜 사람’ 임을 증명하려 애썼던 시절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나의 가치를 드높이는 행위라 착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생각만으로도 어깨가 무거워지고, 지친다는 느낌이 먼저 찾아온다. 그 수많은 약속들 중에서, 진정으로 나의 마음이 닿아 편안함을 느꼈던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 수많은 만남 속에서 진정으로 나를 이해하고 지지해 준 이들은 몇이나 될까. 과거를 돌이켜볼수록 마음 한구석이 조용히 수그러들며, 씁쓸한 감정이 밀려온다. 한때는 아름답다 믿었던 덧없는 거품들이 산산이 부서지는 허무함이 밀려오는 듯하다.


살아가면서 비로소 깨닫는 진리들이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과 가까워질 수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 그리고 깊이 있는 관계는 소수로도 충분하다는 것. 너무 많은 관계는 피상적인 교류만을 남기고, 진정한 연결을 방해한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대부분의 피로는 상대방의 부탁이나 기대에 거절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자신을 내어준 데서 비롯된다는 쓰디쓴 교훈. 때로는 나를 위한 희생이라 여겼던 것들이 실은 타인의 편의를 위한 일방적인 헌신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기도 했다. 하루를 온갖 것으로 채우기보다, 오히려 비워내는 행위가 더 많은 것을 돌려준다는 역설적인 깨달음은 나에게 큰 전환점이 되었다. 꽉 찬 물병이 더 이상 물을 담을 수 없듯이, 나의 삶도 너무 많은 것으로 가득 차서 진정으로 소중한 것들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도서관에서 찾은 평화

그 비움의 서막은 어느 무더운 여름날 찾아왔다. 점심과 저녁 약속을 모두 취소하고 홀로 도서관으로 향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바깥세상은 푹푹 찌는 더위로 후끈거렸지만,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뜨거운 습기가 한 겹 벗겨지는 느낌이었다. 책장 사이에 스민 공기는 고요하고 서늘했으며, 바람 한 점 없어도 충분히 시원했다.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도, 끈적이던 감정도 그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조금씩 가라앉았다. 소음이 사라진 공간에서는 나의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워졌고, 습한 공기에 끈적했던 몸과 마음이 순간적으로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피난처를 찾은 여행자처럼, 도서관 구석의 작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손에 잡히는 대로 책 한 권을 천천히 펼쳐 들고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그간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내 안의 갈증이 조금씩 채워졌다. 그날 처음으로 누군가의 시선이나 눈치를 의식하지 않고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내는 법을 배웠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활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고, 책 속의 문장들은 나의 내면 깊숙이 스며들어 메말랐던 감성을 촉촉하게 적셨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단단한 무언가가 채워지는 듯한 충만한 기분. 그 작은 선택 하나가 하루 전체의 마음의 흐름을 조용히 바꾸어 놓았다. 겉보기엔 별것 아닌 시간이었지만, 그날의 경험은 내 안에 깊고 조용한 여운을 남겼다. 복잡한 외부 세계로부터 나를 분리하고, 오롯이 나 자신과 마주하는 귀한 시간이었다. 아무도 부르지 않았지만, 꼭 필요한 곳에 다녀온 날이었다. 그날 나는 세상의 속도에서 벗어나 나만의 시공간을 확보하는 법을 터득했다.


미니멀리즘으로 삶을 정돈하다

요즘 나는 미니멀리즘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려 노력한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소유물을 줄이는 차원을 넘어, 삶에 스며든 불필요한 것들까지 조심스레 걷어내는 일, 즉 나를 둘러싼 질서를 다시 세워가는 일련의 움직임이다. 억지로 맞춰야만 하는 관계에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아무리 노력해도 감정의 매듭이 풀리지 않는 사람과는 억지스러운 대화를 시도하기보다 차라리 침묵을 택한다. 때로는 침묵이 수많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하고, 더 큰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배웠다. 누군가를 이해하려 애쓰는 마음은 여전히 소중하지만, 나 자신의 존재를 지우면서까지 유지해야 할 관계는 이제 과감하게 놓아주기로 결심했다. 나를 끊임없이 소진시키고, 나다운 모습을 잃게 하는 관계는 아무리 오래되었고 익숙하다 할지라도 결국 독이 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래된 문장을 조심스럽게 지워나가듯, 나의 마음에 부담을 주는 무리한 관계들을 천천히 정리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관계의 여백이 비로소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여백은 새로운 관계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나 자신과 더 깊이 연결될 수 있는 내면의 공간이었다. 나의 내면이 단단해지고 독립적인 존재로 거듭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감정 역시 오랫동안 타인의 말과 시선에 기대어 흔들렸다. 뜻 없이 흘린 말 한마디에도 마음은 오래 머물렀고, 전하고자 했던 진심이 제대로 닿지 않을까 염려하며 밤을 지새운 날도 많았다. 조그만 오해에도 마음이 서늘하게 꺾였고, 타인의 눈빛 하나에 내 감정이 기울어지는 순간들이 잦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말 한마디에 오래도록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감정의 파고가 일더라도 그것을 흘러가도록 두는 법을 배웠고, 나의 감정이 언제, 왜 시작되었는지를 찬찬히 되짚어볼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그것은 감정을 억누르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며 스스로를 통제하는 능동적인 훈련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문자에 곧장 답하지 않고 여유를 두게 되었고, 의도적으로 일정이 비어 있는 날을 남겨두는 습관도 자리 잡았다. ‘즉답’과 ‘즉각적인 반응’이 미덕처럼 여겨지는 현대 사회에서, 나는 의도적으로 나만의 속도를 지키려 노력한다.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함부로 타인에게 내어주지 않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어느 날, 모처럼 비어 있던 일정표를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 시간은 누구도 아닌,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라고. 이렇게 해서 비로소 나를 위한 온전한 시간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진정한 휴식과 활력을 되찾는다. 나의 내면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외부의 어떤 것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중심을 갖추게 되었다.


간소함, 삶의 지혜로운 선택

간소함은 결코 게으름이나 무기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의 본질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그것을 정돈된 태도로 마주하는 지혜로운 방식이다. 진정으로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묻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과거에는 수첩과 스케줄러를 빼곡히 채워 넣으며 하루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 했다면, 지금은 단 한 장의 메모지에 몇 줄만 간결하게 적고도 충분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복잡하고 세세하게 통제된 계획 대신, 나는 정련된 일상의 힘을 믿는다. 걷기, 마시기, 읽기와 같은 아주 소박하고 반복적인 행위들이 역설적으로 나의 하루를 견고하게 지탱해 준다. 이 사소한 일상 속에서 나는 나 자신과 깊이 연결되고, 내면의 평화를 얻는다. 잘 정돈된 서랍 속에서 필요한 물건을 쉽게 찾을 수 있듯이, 간소함은 나의 삶을 명확하고 효율적으로 만들어준다.


삶은 이제 크고 번잡한 것들이 아니라, 작고 조용한 것들로 다시 세팅되고 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커피를 천천히 내리는 시간, 그윽한 커피 향이 온 집안을 채울 때의 평온함, 손바닥에 따스하게 스며드는 햇살의 온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오래된 재즈 한 곡이 주는 평화로움. 이런 소박하고 잔잔한 하루 속에서 나는 천천히 회복되고, 채워지고 있다. 더 이상 외부의 자극에 휘둘리거나,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불필요한 에너지와 감정을 소모하지 않아도 된다는 깊은 안도감이 찾아온다. 내 삶의 결은 점점 더 가벼워지고, 동시에 내면은 더욱 단단하게 여물어간다. 거친 파도가 잠잠해지고 잔잔한 호수처럼 변해가는 내면의 풍경을 보는 듯하다. 내면의 리듬이 차분히 정돈되고, 삶에 대한 감각이 새롭게 깨어난다. 그 흐름 안에서 나는 나를 더 깊이 이해하고, 삶의 중심을 다시 세워가고 있다.


비운다는 것은 무언가를 잃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을 가득 채웠던 소음들을 줄여서,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삶의 본래 목소리를 비로소 선명하게 듣는 일이다. 어지럽고 복잡한 감정들로 가득 찼던 마음의 방을 차분히 정리하고 나면, 그 공간에는 오래되고 진실된 나 자신의 언어가 남아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세상의 시선이나 타인의 기대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 나가 아닌, 순수하고 본질적인 나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진정한 나 자신이 된다. 외부의 소음에 휩쓸리지 않고, 나의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진정한 소리에 집중하는 것. 간소함은 결국 나의 본질로 돌아가는 가장 솔직하고 용기 있는 길이다. 이 길을 통해 나는 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이는 어쩌면 가장 어려운, 하지만 가장 가치 있는 자기 이해의 여정이다.


간소함이 선사하는 진정한 자유

복잡함과 번잡함으로 가득 찼던 삶이 내 숨통을 조여 오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나는 늘 무언가를 더하고 채우는 것에 몰두했고, 비움은 결핍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간소함이 내 삶의 숨구멍이 되어주고 있다. 불필요한 관계도, 얽매이던 감정도, 과도한 일정도 덜어내고 비워낸 그 자리에 마침내 진정한 나 자신이 편안하게 존재하고 있다. 타인의 시선과 기대에 맞춰 번잡함을 감당하며 살아왔던 과거의 날들보다, 이제는 조용히 물러나와 나의 속도를 지키는 용기가 훨씬 더 크고 귀하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이 용기는 외부에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나 자체로 충분하다는 내면의 확신에서 비롯된다. 외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나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참된 용기가 아닐까.


나는 더 간소하게 살고 싶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애쓰기보다 덜어내는 것에서 오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고 싶다. 그 기쁨은 소유에서 오는 만족감과 차원이 다른, 내면의 깊은 평화와 자유로움이다. 다정하지만 분명한 경계선을 설정하여 소중한 관계들을 건강하게 지키고, 내 마음의 고유한 속도를 존중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싶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명확히 구분하는 지혜를 가지고 싶다. 간소한 삶은 결코 지루하거나 초라하지 않다. 그 안에 더 넓고 깊은 내면의 공간이 존재하며, 그 공간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텅 빈 도화지에 나만의 그림을 자유롭게 그릴 수 있는 것과 같다. 그 그림은 오직 나만이 그릴 수 있는, 나만의 고유한 삶의 모습이다.


하루가 저물어간다. 오늘은 누구에게도 나의 감정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고, 아무런 약속도 없었으며,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의 마음은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환하고 평화로웠다.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잠시 멀어져,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었던 하루였다. 조용히 접히는 하루 속에서, 나는 지금도 가장 나다운 풍경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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