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편 - 언더독, 조명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어난 마음의 기록
살면서 우리는 모두 한 번쯤, 조명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선다.
화려한 중심 무대는 다른 이의 몫처럼 보이고, 나는 그 주변을 맴돌며 묵묵히 나만의 싸움을 이어간다. 박수도, 기대도 없으며, 때로는 존재 자체가 간과되기 일쑤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가장 고요한 그곳이 나를 가장 크게 자라게 했다. 그곳은 비로소 나 자신과 오롯이 마주할 수 있는, 내면의 깊이를 탐색하는 훈련장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나를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언더독’이라는 말은 원래 스포츠 경기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이길 확률이 낮고, 조건상 불리한 쪽. 응원은 받을 수 있어도 기대는 받지 못하는 존재를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이 단어는 어느 순간부터 삶 전체로 스며들었다. 중심 무대에 서지 못한 사람들, 기대의 외곽에서 묵묵히 싸우는 이들, 그리고 조명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마음들. 언더독은 패배할 확률이 높은 사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대에서,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고 살아내는 이들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뿌리내려 기어이 꽃을 피우는 생명력과 같은 존재다.
언더독은 불리한 위치에 선 자를 일컫는다.
세상은 그들에게 낮은 기대치를 부여하고, 능력을 과소평가하며, 배경이나 조건을 불리하게 본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 머물러 물러서지 않는 이들에게는 특유의 단단함이 배어 있다. 타인의 시선 밖에서 쌓아 올린 시간, 울고 싶었지만 억지로 삼킨 눈물, 비웃음 속에서도 꿋꿋이 붙잡았던 희망의 끈. 이렇듯 묵묵히 견뎌낸 감정의 층위들이 언더독을 누구보다 강인한 존재로 빚어낸다. 이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성공의 잣대가 아닌, 내면의 깊이와 성숙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한다.
겉으론 고요해 보이지만, 속은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나 또한 그런 시기를 통과해 왔으므로. 그 시간은 마치 견고한 뿌리를 내리는 과정과 같았다. 땅속 깊이 박힌 뿌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어떤 폭풍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의 기둥이 되어주듯이, 나의 언더독 시절은 내 삶의 굳건한 기반이 되어주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가장 솔직해질 수 있었고, 외부의 평가가 아닌 나만의 기준으로 삶을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관계의 시험대, 홀로 선 용기
세상이 '가능성'이 없다고 속삭이던 때가 있었다. 신입 개발자로서 지원한 회사에서 연달아 불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 나는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다. 그날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내 마음속 절망의 파편들과 닮아 있었다. 온몸의 힘이 스르르 풀리는 듯한 기분에 아무 말 없이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들고 회사 계단에 털썩 앉았다. 차가운 캔이 손에 닿는 감각이 이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일깨웠다. '나는 안 되는 사람인가, ' 그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며 마음을 잠식해 들어왔다. 그 당시의 나는 한겨울의 메마른 가지처럼 시들해져 있었다. 나의 열정과 꿈이 얼어붙은 듯한 느낌이었다.
가까운 이들조차 나의 고독한 싸움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왜 그렇게 어렵게 사느냐,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게 좋겠다"는 현실적인 조언들은 때로 예리한 칼날처럼 박혔고, 심지어 어떤 이는 소리 없이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그림자를 보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정말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걸까? 그런 시선들 속에서 나는 과연 제대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자기 의심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초라한 시작이었고, 결과는 미지수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 당시의 나는 스스로에게도 한없이 초라한 존재였다. 그 시절의 나는 외부의 평가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어린 잎새와 같았다. 인정받고 싶었고, 사랑받고 싶었으며, 나의 존재 가치를 누군가에게서 확인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 어떤 외부의 확인도 내 안의 공허함을 채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날 밤, 젖은 옷을 갈아입고 책상에 앉아 텅 빈 모니터를 응시하던 나는 문득 깨달았다. 포기 대신 새로운 기술을 공부하며 다시 코딩을 시작한 그 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다 끝났다고 믿었던 그 순간, 도전은 내게 남은 단 하나의 숨통이었다. 비록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계속 가야 한다는 내 안의 목소리는 어떤 외부의 소리보다 강렬했다. 그 마음 하나로 하루하루를 견뎠다. 기대 없는 시선 속에서도 나를 버티게 만든 것은 외려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그 현실이었다. 마음껏 실패해도 된다는 자유, 그 바닥에서 나는 오히려 단단해졌다. 실패는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나를 성장시키는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처음엔 증명하고 싶었고, 그다음엔 설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저 살아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얻은 것은 놀라운 해방감이었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도 묵묵히 내 옆을 지켜주며 아무 말 없이 라면을 끓여주던 친구의 조용한 행동은 어떤 위로의 말보다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았다. 광야를 걷는 듯한 고독 속에서도, 그런 작은 지지 하나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느껴졌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관계의 거리를 조절하는 법을 배우는 것 또한 이 길에서 얻는 값진 교훈이었다. 처음엔 외면을 견디는 것도 버거웠지만, 지금은 그 시절의 고요함이 내 안의 중심을 만들었음을 안다. 마치 감정의 사계절을 겪으며, 겨울의 혹독함을 지나 봄의 생명력을 얻고, 여름의 뜨거움을 견뎌 가을의 결실을 맺는 것처럼, 나의 내면은 언더독의 시간을 통해 깊어지고 성숙해졌다. 더 이상 외부의 온도에 쉽게 얼어붙거나 녹아내리지 않는 단단한 존재가 된 것이다. 이제 나는 외부의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가 되었다.
나만의 속도, 나만의 가치
언더독의 힘은 조용히 싸우는 데서 온다. 자신만의 속도로 나아가며, 타인의 속도를 부러워하지 않고, 작은 성취에도 기꺼이 감동할 줄 아는 자세. 언더독은 처음부터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며 깊어지는 사람이다. 외부의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의 흐름을 따라갈 줄 아는 이들이 결국 오래도록 자신만의 길을 걷는다. 나 역시 그 진실을 너무 늦지 않게 알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 깨달음은 예상치 못한 선물이었다. 삶의 진정한 보석은 화려한 성공이 아니라,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데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사회는 종종 우리에게 빠르고 화려하며 명확한 결과물을 요구하는 특정한 성공의 로드맵을 제시한다. 대기업 입사, 고소득, 명예로운 직함. 이러한 지표들이 성공의 전부인 것처럼 포장된다. 하지만 언더독은 그 템포를 따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만의 리듬으로 움직이며, 겉으로 드러나는 성과보다는 내면의 성장에 집중한다. 마치 오랜 시간 땅속 깊이 뿌리내리는 나무처럼, 묵묵히 자신의 기반을 다져나간다. 이들의 꾸준함은 주변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 믿음은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스스로 다져진 것이기에 더욱 단단하다.
언더독으로서의 경험은 단순한 역경 극복을 넘어, 나만의 독자적인 삶의 철학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성공'의 정의는 더 이상 나에게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대신 나만의 속도, 나만의 만족, 나만의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빨리 가는 것, 남들과 같은 길을 가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느리더라도 꾸준히 가는 것, 남들과 다른 길을 택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창출한다는 것을 배웠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작했기에 얻을 수 있었던 작은 성취에 대한 진정한 감사함과 겸손함,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타인의 어려움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 과정은 그 어떤 화려한 성공보다 값졌다. 이 깨달음은 나를 세상의 기준에서 해방시켰고, 진정한 자유를 선사했다. 나의 가치는 이제 외부의 잣대가 아닌, 내면의 충실함에서 비롯된다.
불편함을 마주하는 용기, 비포장도로의 미학
누군가는 묻는다. 왜 굳이 그리 어렵게 가느냐고. 인정받기 힘든 길이라면, 더 쉬운 방향을 택하는 게 낫지 않으냐고. 하지만 쉬운 길이 모든 이에게 맞는 길은 아니다. 언더독은 개인의 능력 부족으로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불평등하게 설계된 사회 구조의 산물이다. 사회는 늘 효율과 결과를 숭배하고, 보이지 않는 기준으로 누군가를 주류에서 밀어낸다. 출발선이 다른 건 단지 비유가 아니라, 현실이다. 태어난 지역, 부모의 경제력, 학력, 젠더, 나이, 심지어 피부색까지. 우리 사회는 이러한 기준들로 사람을 조용히 분류하고, 기대의 높이를 결정해 버린다. 무대는 열려 있다고 말하지만, 조명이 켜지는 순서는 언제나 정해져 있다.
그렇기에 이 위치에 선 이들은 안다. 속도가 다르다는 걸, 출발점이 다르다는 걸. 그래서 더 조용히, 더 오래 달리는 법을 터득해 간다. 사회는 마치 잘 닦인 고속도로처럼 누군가를 태우고 빠르게 나아가지만, 언더독은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묵묵히 걷는 사람과 같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는 한,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놓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얻는 것은 속도나 효율성 이상의 가치, 즉 진정한 강인함과 회복력이다. 비포장도로를 걷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땅의 감촉, 바람의 무게,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만나는 예상치 못한 풍경이 있다.
우리는 불편함을 피하고, 쪽팔림을 회피하며, 험한 길은 결코 가려하지 않는다. 대신 편하고 깔끔한 루트에서 대단한 결과만을 원한다. 그러나 성장은 늘 부끄러움 위에 선다. 창피함을 견디는 능력이 곧 인간의 크기다. 언더독의 길은 바로 이 불편함과 부끄러움을 기꺼이 마주하는 과정이다. 남들이 보기에 초라할 수 있는 시작점, 수많은 실패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끈기, 이 모든 것은 자신을 더 큰 사람으로 만드는 자양분이 된다. 젖은 옷을 입고도 다시 책상 앞에 앉아 텅 빈 화면을 응시할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언더독의 진정한 용기다. 세상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언더독의 모습은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말없이 보여준다.
편견을 넘어선 강인함의 이름
나는 지금도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언더독'이라는 말은 과연 누구의 기준일까. 기대 밖의 자리에서 피어난 사람은, 정말 기대 이하의 사람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이 단어 자체가 우리 사회가 가진 편견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주류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그런 구조 안에서도 꺾이지 않는 마음은 더 이상 '약자'라 부를 수 없는 강인 함이다. 언더독은 이 시대가 외면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이름이다. 열정은 있지만 기회는 없고, 재능은 있지만 배경이 없는 사람들. 이들은 사회의 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대 밖으로 밀려나지만, 그 조용한 바깥에서 오히려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간다. 언더독의 존재는 사회가 놓친 가능성의 지도를 다시 그리게 만든다.
‘능력주의’는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실패는 개인의 탓으로 전가되고, 언더독의 자리는 무능의 결과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구조적 차별과 기회의 격차가 그대로인 채로, 공정은 허상일 뿐이다. 우리는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왜 언더독이 생기는가가 아니라, 왜 언더독이 계속 생기도록 사회가 설계돼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언더독이라는 이름표를 단 채로도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존재는 단순한 개인의 노력을 넘어선다. 그들은 사회가 정한 틀에 갇히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의 가치를 증명해 내는 진정한 개척자들이다. 그들은 조용히 사회의 지평을 넓히고,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세상에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나는 언더독을 응원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나의 지난날도 이제는 조용히 껴안는다.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그 시간들이 결국 나를 지탱해 줬음을 이제는 이야기할 수 있다. 그 시간들은 나를 부수고 다시 세우는 과정이었다. 언더독은 누군가에게는 단지 '약자'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꾸준히 살아내는 이'였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사회의 다양성과 가능성을 확장시키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들은 틀에 박힌 성공 공식에 균열을 내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길은 무수히 많음을 증명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혹시 그 자리에 서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누구의 박수도, 시선도 받지 못하는 자리에서 묵묵히 버티는 당신은 이미 충분히 강하다고. 눈에 띄지 않아도, 조용한 곳에서 꽃을 피우는 사람의 용기는 더 오래도록 빛난다고. 당신이 지금 홀로 걸어가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외로운 싸움만은 아닐 겁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당신과 같은 길을 걷는 수많은 언더독들이 존재하며, 그들은 당신의 조용한 용기를 함께 응원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다고 해서 당신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당신은 지금 가장 용기 있는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 중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뿌리내린 인내와 땀방울은 언젠가 더 큰 열매로 돌아올 것입니다. 나는 그런 시간을 믿고 기다립니다. 그리고 당신의 조용한 용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언더독이라는 말에는 의외로 아름다운 결이 있다. 상처받은 이들의 복잡한 마음, 기대에 못 미쳐도 포기하지 않는 의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고요한 싸움. 그런 마음을 알고 나면, 더는 언더독이라는 말이 약자로만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시작이 달랐던 사람들, 그러나 결코 끝을 가볍게 만들지 않는 사람들의 또 다른 이름이다. 어둠 속에서 가장 빛나는 별처럼, 언더독은 역경 속에서 더욱 강렬하게 빛을 발한다. 그들은 세상이 미처 보지 못하는 곳에서 자신만의 아름다운 빛을 발하며, 그 빛은 주류의 조명보다도 더 깊고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든다.
조명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피어난 용기. 그것이야말로 가장 눈부신 빛이라는 걸, 오늘도 나는 조용히 믿는다. 그 빛은 우리 사회에 진정한 희망과 영감을 선사할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을 통해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의미 있는 삶을 일궈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