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편 – 감정을 말하지 못해 눅눅해진 날들을 위한 작은 연습
숨 쉬듯 감정을 환기하는 연습
집 안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지던 날이 있었다. 아무도 없었는데도 방 안은 무거운 기운으로 가득했다. 마치 오래된 먼지처럼 공기가 축 처진 기분이었다. 처음엔 그저 피곤해서 그런가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답답함은 심해졌고, 결국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창문을 활짝 열었다. 꽉 막혔던 공기가 밖으로 확 쏟아져 나갔다. 그러자 시원한 바깥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바람은 단순히 공기만 바꾼 게 아니었다. 답답했던 방 안의 기운을 싹 쓸어내고, 시원하고 상쾌한 느낌으로 채워주었다.
그때 깨달았다. 우리는 숨을 쉬고 있었지만, 우리가 있던 공간은 이미 오래전에 환기가 안 되고 있었다는 것을. 겉으로는 괜찮아 보였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탁한 기운이 조금씩 쌓이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마음도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일하고,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지만, 속으로는 닫힌 방처럼 멈춰 있었다. 혹시 우리는 감정을 꾹 눌러두고 문을 닫은 채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고 있었던 건 아닐까? 밖과 소통하지 않고 혼자 틀어박힌 채, 마음의 문을 꽁꽁 잠가두고 있었던 건 아닐까?
감정의 흐름이 멈추는 순간
마음은 외부와 단절된 채 너무 오래 닫혀 있으면, 안쪽부터 서서히 습기 찬다. 축축하고 끈적이는 정서의 습기가 마음속 깊이 스며들어 모든 것을 무겁게 만들지. 가만히 두면 저절로 괜찮아질 줄 알았던 감정들은 되려 더 눅눅해지고, 잊은 줄 알았던 과거의 상처는 마치 어둠 속에 피어나는 이끼처럼 스멀스멀 번져간다. 이 습기와 이끼는 마음의 건강을 좀먹고, 우리의 활력을 앗아간다. 우리는 종종 마음의 통증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려 하지만, 마치 병든 몸처럼 마음도 적절한 돌봄과 환기가 필요하다. 방치된 마음은 결국 더 큰 문제로 이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안다.
심리학자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감정은 억제하거나 저장하는 대상이 아니라, 흐르게 해야 하는 생리적인 반응이라고. 감정은 우리 몸의 혈액순환처럼 자연스럽게 흘러야 하며, 그 흐름이 막히면 문제가 발생한다고 경고한다. 감정을 억눌러 두면, 겉으론 아무 일 없는 듯 보이지만 안쪽에서는 서서히 압력이 쌓여갑니다. 한순간 터지거나, 오래되며 흐릿해지고 무거워질 수도 있습니다. 감정은 멈춘 채 오래 머물기보단, 흐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바로 감정 환기(emotional ventilation)다. 이는 내면에 눌러 앉힌 감정들을 적절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해소함으로써 내면의 긴장을 완화하는 심리학적 처리 과정이다. 마치 창문을 열어 답답한 공기를 내보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는 것처럼, 마음속에 쌓인 감정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새로운 감정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감정 환기는 단순히 분노나 슬픔 같은 부정적인 감정만을 해소하는 게 아니다. 기쁨이나 설렘 같은 긍정적인 감정 또한 충분히 표현하고 나누어야 비로소 마음이 건강하게 순환할 수 있다. 감정을 억제하는 감정 억압(emotional suppression)은 단기적으로는 문제를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심리적 고통을 가중시킬 수 있다.
감정은 창문을 닫은 채 김이 서린 거울 같다. 닦지 않으면, 내 얼굴조차 흐릿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이 자연스러운 흐름에 역행하며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침묵의 대가
우리는 괜찮은 척, 아무 일 없는 척 가면을 쓴다. 감정을 안으로 삼키고 꾹 참는 것이 마치 성숙하고 현명한 태도인 양 믿으며, 방금 욱하고 올라온 마음조차 ‘나만 참으면 돼’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무시해 버리지. 타인에게 약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갈등을 피하고 싶어서 감정을 감추는 경우도 많다. 사회적 시선이나 기대치 때문에 자신의 진짜 감정을 숨기려는 경향도 무시할 수 없다. 정서 표현(emotion expression)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말이다.
문제는 그렇게 감정이 흐를 통로를 잃을 때, 마음은 심각한 ‘감정적 갈증’에 걸린다는 점이다. 마치 혈액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몸에 병이 생기듯이, 감정의 순환이 막히면 마음에도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한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사소한 일들이 어느 날 갑자기 감정의 폭발처럼 터져 나오고,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감정이 흘러버리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내면에 눌러 앉힌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다만 형태를 바꾸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때로는 불안감으로, 때로는 무기력함으로, 때로는 원인 모를 신체적 통증으로 나타나 우리를 괴롭힌다. 스스로도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나는지, 왜 이토록 슬픈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렇게 마음은 무너진다. 이는 오랫동안 쌓여온 감정의 잔여물들이 뒤섞여 폭발하는 결과일 수 있다.
닫힌 마음에도 바람이 통하는 작은 환기구가 필요하다. 그 환기구는 특별하고 거창한 의식이나 노력이 필요한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 일상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소박하지만 강력한 행위들이다.
마음의 창을 여는 연습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감정이 올라오더라도, 그것을 좋고 나쁨으로 판단하거나 억지로 밀어내지 않고, 그저 ‘아, 지금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연습이 필요하다. 마치 거울을 보듯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슬프면 슬픈 대로, 화나면 화나는 대로 그 감정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이러한 자기 인식은 감정을 건강하게 다루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혼잣말처럼 일기를 적어보는 일도 훌륭한 감정의 통로가 될 수 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누구에게 보여줄 목적도 없이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들을 손 가는 대로 적어 내려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복잡하게 얽혀 있던 감정의 실타래를 풀고, 스스로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기회를 얻게 된다. 글로 표현하는 행위 자체가 감정의 해소와 정리에 큰 도움을 준다.
친한 친구에게 아무 목적 없는 전화를 걸어 마음의 무게를 조금 덜어놓는 일도 좋다. 조언을 구하거나 해결책을 찾으려는 목적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짐을 한결 가볍게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감정적 지지를 제공하고,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이때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게 어떤 것을 얻어내려 하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혹은 그냥 조용히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도 마음의 내면의 기류를 바꾸는 시간이 될 수 있다. 복잡한 생각과 감정을 잠시 멈추고, 현재 순간에 집중하며 평화로움을 느끼는 시간은 우리 내면의 소란스러움을 잠재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잔잔한 음악과 바깥 풍경에 집중하며 마음을 비우는 과정은 명상과 유사한 효과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이는 마음에게 잠시 휴식을 주고,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과 같다.
건강한 감정의 순환을 위하여
중요한 것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과 감정에 휩쓸리는 것은 다르다는 점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표현은 감정의 건강한 순환을 돕고, 억압은 정체를 만든다. 감정에 휩쓸린다는 것은 감정의 노예가 되어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거나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의미한다면,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인지하고, 그것을 건강하고 적절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자기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말로 꺼내는 연습은 단단하고 유연한 마음의 바탕을 만든다.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마치 모호한 형태의 안개를 구체적인 형체로 만드는 것과 같아서, 이해하기 쉽고 다루기 쉽게 만든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어느 시절, 말을 줄였다. 그리 크지 않은 감정이었는데도,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침묵을 선택했다. 어쩌면 표현하면 오히려 일이 커질까 봐, 괜히 감정적이라는 말을 들을까 봐, 혹은 타인에게 부담을 줄까 봐 걱정하는 마음에 조용히 삼켜버린 날들이 있었다. 우리는 침묵이 미덕이라고 배웠고,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약함의 증거라고 오해하기도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론 무너지고 있었던 순간들. 당신도 그랬을 것이다.
누군가는 침묵 속에 자신을 꾹 눌러두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웃는 얼굴로 마음속 깊이 숨겨진 짐들을 감췄다. ‘나는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라고 되뇌면서, 실제로는 내면에서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평온한 모습을 유지하려 애썼다. 이러한 침묵의 시간들은 우리의 마음속에 해소되지 않은 감정의 덩어리들을 쌓아 올렸다. 마치 지진 활동이 없는 듯 보이지만, 지하 깊은 곳에서는 끊임없이 지각판이 움직이며 에너지를 축적하는 것과 같았다.
문제는 그렇게 표현하지 못하고 억눌린 감정들이 때로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엉뚱하고 날카로운 모서리로 튀어나왔다는 점이다.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에게 아무 이유 없이 짜증을 내거나, 사소한 오해로 큰 싸움이 번지거나, 뒤늦게 후회할 만한 말들을 쏟아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땐 왜 그랬을까’ 싶은 당황스러운 장면들 뒤에는, 말하지 못했던 감정의 잔여물들이 숨어 있었다. 그 잔여물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쌓여 있다가, 결국 가장 약한 고리에서 터져 나오곤 했다.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마음의 건강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또한, 말이 아닌 침묵이 때로는 더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침묵은 오해를 낳고, 소통의 부재는 관계를 멀어지게 만든다. 서툴더라도 감정을 통과시키고, 내면의 기류를 바꾸는 연습이 결국은 더 나은 연결과 깊은 관계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배우게 된 것이다. 감정의 솔직한 표현은 우리를 더 인간답게 만들고,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말하지 못한 감정이 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마음은 환기를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한 바람이 스며들기를, 텁텁하게 쌓인 감정들을 부드럽게 털어내 줄 손길을, 긴장과 짓눌림을 섬세하게 풀어주는 따뜻한 시선을 간절히 기다린다. 마음은 스스로 치유하고 회복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으며, 환기는 그 본능을 일깨우는 중요한 촉매제가 된다.
마음은 가끔, 복잡한 말이나 거창한 해결책보다 그저 기류를 바꾸는 일이 먼저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꽉 막힌 공간에 신선한 바람이 필요하듯, 굳게 닫힌 마음에 새로운 공기가 드나들 틈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 하루의 끝에서 문득 알 수 없는 답답함이나 묵직함이 느껴진다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우리의 마음 창도 조금 열어주자.
감정의 바람은, 무너진 마음 위에 다시 창을 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