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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을 다시 세우는 자리

고요가 삶의 지도를 다시 펼쳐 주는 순간

by 정성균

회사에서의 긴 미팅을 마치고 나니, 몸과 마음이 조금은 무거웠다. 그 자리를 함께한 이는 회사를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늘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지인이라 그의 말은 언제나 현실의 무게와 함께 다가왔다. 대화가 끝난 뒤, 나는 곧장 집으로 향하려 했으나 그가 조용히 권해준 공간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시간이 일찍 풀려, 홀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채울까 고민하다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관을 열고 들어서자, 한순간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높은 층고는 답답했던 호흡을 열어 주었고, 오래된 벽과 기둥은 과거의 흔적을 그대로 품은 채 지금의 감각과 겹쳐져 있었다. 은은한 조명이 공간 전체를 감싸고, 낮게 흐르는 음악은 고요를 한층 두텁게 만들었다. 몇몇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누구도 시선을 주지 않았지만 서로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감이 흘렀다. 그 정적 속에서 나는 홀로 있으면서도 고립되지 않았다는 묘한 위안을 받았다.


멈춤이 일깨운 사유


삶은 늘 속도를 요구한다. 잠깐 멈추면 낙오될 것 같고, 뒤처지면 모든 것을 잃는 듯한 불안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그날의 경험은 달랐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 커피잔이 가볍게 내려앉는 소리,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리듬. 그 모든 작은 움직임들이 오히려 내 안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멈춤은 공백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위한 준비였다.


그 자리에 앉아 있으니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생각들이 차례로 고개를 들었다. 아직 다 정리하지 못한 다짐, 애써 밀어두었던 질문이 서서히 되살아났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책 속 문장을 따라 읽지 않아도, 스스로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언어가 있다는 사실을. 고요 속에서 다시 만난 것은 타인의 지혜가 아니라 내 안에 숨어 있던 목소리였다.


과거의 흔적과 현재의 숨


브라운핸즈 라키비움은 평범한 카페나 서점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공간이었다. 한때 국가 산업공단의 회관으로 쓰였던 자리를 리모델링해 지금은 복합 문화공간으로 변모시킨 곳이다. 회의와 집회, 구호와 기계음이 가득했을 과거의 건물은 이제 서가와 전시, 음악과 대화가 교차하는 자리로 다시 살아났다. 과거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현재와 공존하게 만든 그 공간은, 한 도시의 기억이 새로운 세대에게 말을 거는 듯했다.


나는 그곳에서 시간의 다층성을 느꼈다. 산업화의 역사가 여전히 남아 있는데, 동시에 문화와 예술이 그 위에 겹쳐져 있었다. 무너진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꿔 또 다른 역할을 이어가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함께 머무는 풍경 속에서 나는 삶의 궤적 또한 그렇게 변할 수 있음을 생각했다. 실패나 좌절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얼굴로 다시 서는 과정일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타인의 풍경에서 배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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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상담가로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며 소중한 순간들을 글로 기록해 나가고 있습니다.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며, 이를 통해 깊이 있는 사유와 글로 표현하며 교감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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