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고요가 열어주는 새로운 방향
사거리 신호등은 초록과 빨강을 번갈아 내보내며 도시의 시간을 재촉한다. 사람들은 그 빛에 맞춰 발걸음을 옮기고, 차들은 규칙적인 소음으로 도로를 메운다. 그러나 때로는 그 리듬 속에서 한 걸음이 멈춰 선다. 신호는 바뀌었는데 발은 제자리에 머문다. 그 순간, 눈앞의 네온사인은 번져 희미해지고, 내 호흡과 심장 소리만 또렷하게 들린다. 세상은 계속 움직이지만, 나는 길을 잃은 물음처럼 서 있는 것이다.
음악에는 ‘레스트(rest)’라는 기호가 있다. 연주자가 정확한 박자만큼 소리를 내지 않고 머무르라는 표시다. 온쉼표는 네 박, 이분쉼표는 두 박, 사분쉼표는 한 박의 길이로 표기되어, 그 시간 동안 의도된 침묵을 만든다. 그러나 이 침묵은 단순히 공백이 아니다. 연주자들 사이의 호흡을 맞추고, 청자에게는 다음 소리를 기다리게 하는 긴장과 여운을 남긴다. 소리와 침묵이 함께 어우러질 때 비로소 음악은 완성된다. 삶도 그렇다. 쉼이 없는 길은 곧 삐걱이게 된다. 도무지 멈출 틈 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작게 멈춘 순간에 자신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는다. 도시의 소란 속에서 찾아온 작은 레스트는 그래서 단순한 정지가 아니다. 짧은 고요가 삶의 다른 시간을 여는 시작이 된다.
우리는 매일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는다. 스마트폰 화면은 끊임없이 새로운 알림을 띄우고, SNS 피드는 타인의 완벽한 삶을 전시한다. 나도 모르게 그 흐름에 휩쓸려 내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곤 한다. 나는 충분히 잘하고 있는가? 이 길이 맞는가? 이 질문들은 도시의 소음만큼이나 거대한 불안이 되어 우리를 짓누른다. 경쟁은 숨 쉴 틈 없는 속도를 요구하고, 사회는 끊임없이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려가라고 채찍질한다.
이런 삶은 감각을 마비시킨다. 달콤한 커피 향을 맡아도 그저 '카페인'으로만 인식하고, 아름다운 노을을 봐도 '오늘 하루가 끝났군'이라는 생각만 남는다. 몸은 움직이지만 영혼은 공허한 껍데기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모두 길을 잃은 물음표처럼 서 있지만, 다른 이들도 똑같이 멈춰 있을까 두려워 더 빨리, 더 열심히 움직이려 발버둥 친다. 그렇게 감각의 연결 고리는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멀어진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길을 잃는 진정한 이유다. 내 안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세상의 소음에만 귀를 기울인 결과다.
지방의 한 회색 건물 4층, 사무실. 미지근한 찻잔의 마지막 향만이 남아 있었다. 모니터에는 기획서가 켜져 있었지만, 손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책상 위 메모지에는 ‘마감’, ‘수정’, ‘온라인 피드백’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으나, 그날따라 낯선 부호처럼 보였다. 창밖의 나무는 초여름 바람에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무실을 채우던 키보드 소리는 멀리서 희미하게만 울려왔다. 도시의 흐름은 여전히 분주했으나, 그녀는 그 한가운데서 고요히 서 있었다. 그 순간 감각은 도리어 선명해졌다. 잔에 남은 은은한 차향과 차가운 공기의 결, 옷깃을 스치는 바람까지 모두가 한순간에 그녀의 마음을 깨워내고 있었다.
“요즘은 왜 이렇게 서두르지 못하겠는지 모르겠어요.”
그녀의 말은 이미 답을 품고 있었다. 익숙한 속도 속에서 감각은 무뎌졌고, 더 이상 그 흐름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멈춰 선 그 순간, 마음 한편에선 '늦으면 안 돼', '마감은 코앞이야'라는 조급함이 맹렬히 속삭였다. 미지근한 차 향을 맡으며 억지로라도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제야 그녀는 깨달았다. 지난 몇 달간 그녀가 한 일은 그저 주어진 업무를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것뿐이었다는 것을. 진심으로 몰두하거나 깊이 생각하는 시간 없이, 그저 관성으로만 달려왔다는 것을. 손끝에 남은 미열은 오래 전의 장면을 불러냈다. 창가에 앉아 시집을 읽던 오후, 곁에 놓인 따뜻한 차 한 잔. 그때의 고요가 지금과 이어졌다. 감각은 기억을 불러내고,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녀는 깨끗이 비워진 머릿속에 전에 없던 신선한 아이디어를 채워 넣기 시작했다. 그날의 기획서는 '마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문장이 되었다. 그녀는 더 이상 서두르지 않았다. 자신만의 속도를 찾았을 뿐이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