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내 손으로 직접 빚어가던 시절이 있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다시 눈을 감는 순간까지, 하루의 모든 시간이 나에게서 흘러나왔다. 빼곡한 일정을 직접 그리고, 필요한 정보를 발품 팔아 찾았다. 사람들과는 얼굴을 마주하며 부딪쳤고, 수많은 작은 갈림길에서도 온전히 내 판단에 기대어 발을 내디뎠다. 그 길 위에는 으레 실수가 있었고, 계획을 뒤엎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튀어나와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실패와 성공의 무게 또한 오롯이 내가 짊어져야 했다. 그 시간들은 때로 고단한 짐이었지만, 삶의 모든 조각이 내 의지 아래 움직인다는 생생한 감각을 전해주었다.
오늘날의 풍경은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AI가 우리의 에이전트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이 실감나는 요즘이다. 삶의 복잡한 매듭을 대신 풀어주는 존재들이 넘쳐난다. 인공지능(AI)은 방대한 정보를 순식간에 헤집어 핵심을 요약하고, 수십 년 치의 통계를 한눈에 들어오도록 정리한다. 개인 비서 AI는 복잡하게 얽힌 일정을 조율하고 회의록을 작성하며, 언어 모델은 거침없는 문장으로 대화를 돕는다. 금융 매니저는 자산 포트폴리오를 관리하고, 부동산 브로커는 끝없이 쏟아지는 매물 정보를 구조화해 최적의 선택지를 건넨다. 수많은 ‘에이전트’가 우리 곁에 스며들어, 우리가 직접 고민하고 판단하는 수고를 기꺼이 덜어주고 있다.
이제 스스로 결정할 필요조차 사라졌다. 눈을 뜨면 이미 완벽하게 설계된 추천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영화를 고르거나 음악을 들을 때, 심지어 다음 휴가지까지 알고리즘이 미리 제안한다. 나의 취향을 탐색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어느 순간, 알고리즘이 내 취향을 나보다 먼저 짚는 듯했다. 내가 무엇을 보고 싶은지 직접 묻는 대신, 내가 멈추지 않고 본 영상들을 정교하게 분석하여 수백 개의 영상을 끊임없이 던져준다. 새벽 3시, 손에 들린 컵 속 얼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스크롤을 내릴 때마다 새 영상이 밀려들었고, 손끝은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창밖이 밝아올 때에서야, 나는 시간이 통째로 증발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직접 고른 행로라 믿었지만, 사실은 화면에 흘러나오는 영상의 흐름에 몸을 맡긴 셈이었다. 그 순간 ‘이 결단은 정말 내 것인가?’라는 물음이 불쑥 솟았다.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우리의 결정은 이제 의식적인 판단의 결과가 아니라, 무의식적인 반응의 연속으로 변해버렸다.
에이전트는 말 그대로 나를 위해 움직이는 존재다. 그들은 의뢰인의 명확한 목적에 따라 움직이며, 특정 결과를 위해 중간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한다. 에이전트는 피로 없이 방대한 정보를 처리한다. 정확도가 높을 때가 많지만, 빈틈이 전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과 시스템 사이에 깊은 간극이 벌어진다. 에이전트가 아무리 정교하고 뛰어나다 한들, 그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만을 고민할 뿐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나 '그 결단이 나에게 어떤 뜻을 가지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물음은 던지지 못한다.
나는 나에게 묻는 듯 AI에게 물음을 던졌다.
'내가 왜 오늘따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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