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편 - 그 사람 앞에서, 감정은 가장 솔직했다.
누군가는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많이 배운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어딘가 모르게 뭉뚱그려진 문장처럼 느껴졌다. 삶의 페이지를 몇 장 더 넘기고 나서야, 그 말 속에 담긴 진심이 어떤 무게와 깊이를 지녔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배움이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이나 사회에서 익히는 기술과는 전혀 달랐다. 그것은 마음의 구조를 들여다보는 훈련에 가까웠고, 감정의 무게를 견뎌내는 감각이었으며, 자신이라는 존재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더듬이와도 같았다. 사랑은 그렇게 나를 향한 탐험의 시작이었다.
“나만 이렇게 예민한가?”
“왜 그 사람 말에 이렇게 쉽게 흔들리지?”
사랑이 시작되면, 누구나 그런 의문 앞에 선다. 겉모습이 아닌 내면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말 한마디에 유난히 상처받고, 어떤 눈빛 하나에 괜스레 작아질 때, 이전엔 몰랐던 나의 결이 드러난다. 이것은 뇌과학에서 말하는 자기인식(self-awareness)의 강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뇌의 내측 전전두엽(medial prefrontal cortex)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 활성화되며, 특히 친밀한 관계에서 더 활발히 작동한다고 한다. 사랑은 뇌의 고차원적 기능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며, 스스로를 더 깊이 관찰하게 만든다.
“그 사람 말에 또 속상했어. 이상하지?”
“그냥 지나가면 될 일을 왜 이렇게 오래 곱씹을까?”
좋아하는 사람을 향한 감정은 기쁨과 설렘처럼 보이지만, 그 안엔 많은 감정이 뒤섞여 있다. 상대를 잃을까 봐 불안하고,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 의심하게 되며, 끝을 상상하는 두려움이 함께 따라온다.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다가도, 미움받을까 봐 방어적으로 변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감정의 반응은 상대 때문이라기보다, 오랜 시간 내 안에 쌓여온 감정의 패턴일 수 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사람은 이전과 다른 반응을 선택할 여지를 갖게 된다.
심리학자 존 볼비(John Bowlby)의 애착이론(Attachment Theory)에 따르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맺는 방식은 어린 시절 주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정서적 도식(emotional schema)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애정을 갈망하면서도 가까워질수록 불안해지고, 또 어떤 사람은 상대에게 의존하며 스스로를 놓치기도 한다. 현재 관계에서 반복되는 이러한 반응은 과거에 형성된 정서 구조가 다시 드러나는 과정일 수 있다. 사랑은 그 구조를 가장 선명하게 비춰주는 장면이 된다.
“나 왜 이렇게 굼떠질까?”
“이 사람 앞에선 평소랑 달라지는 느낌이야.”
사랑은 나를 시험하는 시간이 아니라, 내 마음을 관찰하게 해주는 기회가 된다. 처음에는 상대를 더 잘 알고 싶어서 시작한 관찰이, 점점 나 자신의 반응과 감정을 향하게 된다.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했는지가 아니라, 그 말에 내가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에 더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나는 이런 상황에선 이런 감정을 느끼는구나’ ‘이런 말을 들을 때 이렇게 반응하는구나’ 하고 말이다.
심리학자 아서 아론(Arthur Aron)은 ‘자기 확장 이론(Self-Expansion Theory)’을 통해, 진정한 사랑은 자기 개념의 확장을 이끈다고 설명한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할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취향, 행동, 생각, 말투 등을 배우게 된다. 상대의 취미를 경험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고, 상대의 가치관을 이해하면서 내 시야가 넓어진다. 사랑은 그렇게 자신을 확장시키는 통로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배움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있다고 해서, 저절로 변화나 이해가 생기는 건 아니다. 관계 속에서 나의 반응을 돌아보고, 감정의 흐름을 읽어내려는 노력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감정지능(emotional intelligence)을 연구한 다니엘 골먼(Daniel Goleman)은 “진심 어린 관계는 공감 능력과 감정 조절력을 자연스럽게 길러준다”고 했다. 사랑은 때로는 기다림을 배우고, 때로는 다투지 않는 표현을 배우는 일이다. 감정을 조절하고, 침묵의 의미를 해석하고, 그 사람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길러주는 훈련이다. 그 과정은 결코 가볍지 않지만, 매우 실질적이고 값지다.
사랑은 누군가를 향한 감정일 뿐 아니라, 나의 모든 태도를 비추는 거울이다. 어떤 말과 표정, 행동을 했는지보다, 그 모든 것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드러내는 순간이 더 중요하다. 그 사람 앞에서 유독 예민해지고, 유독 조급해지며, 유독 나약해지는 이유는 결국 나의 진짜 모습이 그곳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배우는 시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 사람 앞에서 다르게 반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감정이 내 안에서 어떤 지점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살피려는 마음이 있을 때, 비로소 그 만남은 나를 바꾸는 시간이 된다.
“이 관계 안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느끼는 감정은 상대에 대한 것일까, 나 자신의 무의식일까?”
이런 질문 앞에 머무는 순간, 이미 중요한 배움은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그 배움은 끝이 정해진 과정이 아니라, 아주 긴 시간에 걸쳐 계속되는 삶의 일부가 된다. 사랑은 그렇게, 나를 배우게 하는 가장 조용하면서도 확실한 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