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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눈, 듣는 마음》

34편 - 빛이 기울 때, 나는 도서관에 있었다

by 정성균

오후 네 시의 자리


도시의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 세월의 결이 배어 있는 도서관이 있다. 건물 외벽의 벽돌은 수십 번의 햇볕과 비를 견디며 빛이 바랜 색을 품었고, 현관 앞 돌계단에는 오가는 이들의 발자국이 층층이 새겨져 있다. 안쪽 깊은 창가 자리, 계절마다 빛과 그림자가 달라졌지만, 오후 네 시의 햇살이 기울어 들어오는 각도만큼은 단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다.


여름이면 창유리를 통과한 빛이 바닥 위로 부드럽게 흘렀다. 책장 아래 그림자와 어우러져 잔물결처럼 흔들렸고, 책 표지 위에서 은빛처럼 반짝였다. 가을이면 은행잎이 바람을 타고 유리창에 스치며 노란 그림자를 드리웠다. 바닥 위로 길게 번진 그림자는 금빛 물결처럼 천천히 흘러갔다. 겨울이면 문틈 사이로 스며든 찬 공기가 종이 냄새와 섞여 묵직한 향을 만들었다. 그 향은 책장 깊숙이 잠들어 있던 문장 하나를 꺼내듯, 오래된 기억을 불러올 만큼 진했다.


그 자리의 나무 책상은 닳아 반들거렸고, 손바닥이 닿는 순간 숨이 가라앉았다. 공기 속에는 종이와 가죽, 먼지 냄새가 켜켜이 쌓여 있었고, 책장을 넘기는 바스락 거림과 멀리서 들려오는 의자 끄는 소리가 은근한 배경이 되었다.


글이 써지지 않는 날에도 그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문장이 멈춰도, 그곳은 마음을 묶어두는 조용한 닻이었다.


자리를 걷는 사람


어느 날, 책장 사이를 걷던 발소리가 앞에서 멈췄다.
“이 자리는… 예전에 내가 앉던 자리인데.”


낯선 노인의 낮은 목소리는 오래 간직한 책갈피처럼 부드럽고 깊었다. 창밖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숙이고 다른 자리로 향했다. 며칠 동안은 짧은 목례와 미소만 오갔지만, 그 기척은 책장 사이 공기를 은근히 흔들었다. 오래전 이야기가 먼지 속에 잠들어 있다가 조심스레 깨어나는 듯했다.


비 오는 날의 고백


며칠 뒤, 장대비가 유리창을 두드리던 오후였다. 휴게실 맞은편 의자에 앉은 그는 조용히 말을 꺼냈다.
“거긴 나를 키운 자리야. 무너졌을 때도 날 다시 세워줬지.”


취업 준비 시절, 하루 종일 아무 성과도 없는 날에도 이 책상 앞에 앉아 책장을 넘기며 시간을 버텼다고 했다.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울던 날도 있었다고. 목소리에는 수많은 계절과 이 자리에서 견뎌온 시간이 켜켜이 담겨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런 자리가 내게도 있는가. 곧 알게 되었다. 지금 이 도서관, 오후 네 시의 빛이 가장 가까운 그곳이라는 것을.


흔들림과 저항


그의 말은 마음속에 잔잔한 파문을 남겼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속삭였다.
‘글을 써야지, 누군가의 과거 속에 오래 머물면 안 돼.’


그럼에도 오후 네 시가 되면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문장이 내려앉지 않아도 괜찮았다. 기다림이 하루의 일부가 되었고, 그 일부가 글의 숨결이 되었다. 때로는 이야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쓰는 시간보다 더 깊은 문장을 만들기도 했다.


떠나는 계획


며칠 후, 그는 조용히 말했다.
“다음 달이면 이 도시를 떠나.”


그 말은 오래된 편지가 서서히 펼쳐지는 듯 스며들었다. 그가 떠나면, 이 자리의 공기와 빛도 달라질 것 같았다. 뒷모습, 짧은 대화, 숨소리까지. 그제야 깨달았다. 글은 혼자 쓰지만, 자리를 함께 채워주는 사람이 있을 때 더 깊어지고 단단해진다는 것을.


시간을 걷다


그의 발걸음을 따라 도서관 안을 걸었다. 미래를 그리던 창가, 같은 책을 반복해 읽던 자리, 세상으로부터 숨듯 앉아 있던 구석 의자가 있었다. 자리마다 기쁨과 지침, 그리고 작은 웃음이 묻어 있었다.


그 순간, 도서관은 기록만을 담는 곳이 아니었다. 서가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꽂혀 있었고, 책 사이에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계절과 숨결이 스며 있었다.


글은 어디서 자라는가


책장 옆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종이와 먼지, 바깥 비 냄새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알았다. 글이 멈춘 이유는 글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기댈 자리가 없어서였다. 글은 자신을 수용하는 자리에서 자란다.


“왜 이제야 돌아오신 거예요?”
그는 미소를 지었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까지는, 아무 데도 돌아갈 수 없거든.”

그 말은 오래 머물 울림이 되어 남았다. 그 순간, 이 자리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했다.


다시 쓰는 첫 문장


며칠 후, 여전히 오후 네 시의 자리였다. 이번엔 첫 문장이 달랐다.
“도서관은, 돌아갈 수 있는 마음의 자리다.”


책장 사이의 빛과 냄새,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이야기는 결국, 마음이 돌아가고 싶은 자리를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그 자리에서 펜을 들 수 있다면, 이야기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대답, 그리고 당신에게


여전히 이 자리에 앉아 있다. 창밖 그림자가 길어지고, 바람이 낙엽을 밀어 넣는 소리가 발치에 머문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종이 냄새, 오후 네 시의 빛이 하루와 글을 지탱한다.


마지막으로 돌아가고 싶은 자리는 바로 이곳이다. 계절이 바뀌어도, 먼지가 춤추고 종이 냄새가 감싸는 이 자리. 여기라면 무너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당신은 어디로 돌아가고 싶은가.
그곳이 지금,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창을 통해 부드럽게 기울어지는 빛이, 그 대답을 속삭이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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